죽음과 통합

by 신성규

나는 언제부턴가 이방인이 되었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웃음소리와 말들이 공명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세계가 유리벽 너머로 흘러가고,

나는 그 벽 안에서 천천히 굳어가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죽음으로써 세계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건 절망의 독백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 반대였다.

나는 ‘죽음’을 상상함으로써

비로소 ‘삶’이라는 감옥의 벽을 느꼈던 것이다.


삶은 경계의 예술이다.

자아와 타자, 안과 밖, 나와 세계 —

그 모든 경계가 나를 형성하지만, 동시에 나를 고립시킨다.

지나치게 의식적인 자는 이 벽을 너무 명료히 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투명한 벽이 감옥이 된다.

이방인은 그 감옥의 존재를 깨달은 자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존재’가 된다고.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의식의 완성이다.

그렇기에 죽음을 상상하는 일은,

사실상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삶의 사유’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을 또 다른 방향으로 확장하고 싶다.

죽음으로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처럼 사유함으로써 세계와 다시 연결될 수는 없는가?


불교는 이 상태를 “무아(無我)”라 부른다.

자아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

죽음은 이를 극단적으로 실현한 상태일 뿐,

삶 안에서도 가능한 해방이다.


나는 이제 안다.

죽음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의 평화를 그리워한 것이었다.

그 평화는 사랑할 때, 예술에 몰입할 때,

혹은 새벽 공기 속에서 잠시 나 자신을 잊을 때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투명한 감각으로 살아가자.

사유하되, 머물지 말고

느끼되, 붙잡지 말자.

그렇게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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