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대하여

by 신성규

한국 사회는 ‘바보가 되는 경쟁’을 한다.

생각하지 말고, 묻지 말고, 남들처럼 하라.

생각이 많으면 문제아가 되고, 질문이 많으면 불편한 존재가 된다.

결국 ‘평범한 사람’이란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두뇌를 무디게 깎아낸다.


학교에서는 순응이 성실로,

회사에서는 침묵이 협조로,

관계에서는 무비판이 배려로 포장된다.

그렇게 사회는 사고의 포기를 사회성이라 부르고,

비판적 인간을 예민하거나 이상한 사람이라 낙인찍는다.


그런데 그 ‘평범함’의 끝에는 어떤 감정이 있는가?

자살률 1위.

한국의 통계는 그 답을 이미 말하고 있다.

이건 우울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의 질식사다.


생각하지 않으면 편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을 멈춘 자리에는

공허와 분노, 그리고 자기 혐오가 들어왔다.

“왜 나는 행복하지 않지?”

그 질문을 덮기 위해,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산다.

더 바쁘게, 더 피곤하게,

자신의 감각을 마비시켜야

자기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모를 수 있으니까.


한국에서 ‘정상’이 된다는 건

결국 감각을 잃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야근에 무감각해지고, 상사의 폭언에 무감각해지고,

공정하지 않은 구조에 익숙해지고,

결국 자기 마음의 신호에도 둔감해진다.


이 나라는 이상하게도

지나치게 열심히 살면서 동시에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진짜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개성은 불안으로 취급되고,

사유는 반항으로 간주된다.

평범하게 살라는 말은

사실상 “너답게 살지 말라”는 명령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 비슷한 얼굴로 웃고,

서로 비슷한 말로 위로하고,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병든다.


나는 이제 ‘평범’이라는 단어가 무섭다.

그건 더 이상 안정의 상징이 아니라,

집단적 퇴행의 코드다.


평범하게 산다는 건

자신의 사고를 희생시켜 사회적 안전망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안전하지만, 살아 있지 않다.

그들은 죽지 않았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자살률은 높다.

사람들은 죽음을 택하는 게 아니라,

이미 ‘사유의 죽음’ 속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중에 따라갈 뿐이다.


어쩌면 ‘바보가 되는 경쟁’은

가장 집단적으로 정당화된 폭력이 아닐까.

그 폭력은 남을 향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식, 감정, 의문을 향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훈육하며, 순종하며,

“이게 정상이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생각하는 인간은 불행해 보여도, 결국 살아남는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본다.

자유는 늘 불편함에서 시작되고,

그 불편함을 견딘 자만이 행복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평범함은,

결국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다 그런 거지”라는 말로 봉합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까 이 사회의 진짜 문제는

‘우울’이 아니라 ‘순응’이다.


나는 더 이상 바보가 되는 경쟁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생각하는 불행이,

생각하지 않는 평온보다 낫다.

그게 내가 스스로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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