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배고플 때 먹어야 맛있다.
음악도, 섹스도 그렇다.
결핍이야말로 감각의 원천이고,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가장 원초적 통로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그 통로가 닫히는 경험을 했다.
프로작 한 알은 내 불안을 잠재웠지만, 동시에 세계를 잠재웠다.
처음엔 좋았다.
고통이 사라지자 삶은 훨씬 매끄럽게 흘렀다.
사람들과 부딪힐 때의 날카로운 감정이 줄어들었고,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불안의 덩어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감정이 사라지자, 나도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감정은 단지 느낌이 아니다.
감정은 ‘존재의 흔들림’이다.
무언가를 사랑할 때, 미워할 때, 감정은 나와 세계가 충돌하며 생기는 파동이다.
그 파동이 없다면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만, 더 이상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감정이 사라진 세계는 평화롭지만, 동시에 무기력이다.
모든 것이 부유하고, 의미는 아래로 가라앉지 않는다.
기쁨은 더 이상 기쁨이 아니고, 슬픔은 그저 통계적인 데이터처럼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일하고, 대화하고, 웃지만
그 모든 행위에는 실감이 없다.
나의 삶은 살아 있는 복제물처럼 느껴졌다.
결국 인간의 존재는 느낀다는 행위를 통해만 자기 자신을 확증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오늘날에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감정이 사라진 인간은 이성적으로는 완전할지 몰라도,
존재론적으로는 이미 반쯤 사라진 상태다.
프로작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약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문명이 추구하는 일관된 방향,
즉 ‘고통의 최소화’를 향한 문명적 본능이다.
우리는 고통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존재의 진동을 함께 제거한다.
세계는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인간은 점점 더 둔감해진다.
감정의 진공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까?
고통이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위로받을 필요가 없고,
욕망이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감정이 사라진 자는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에서도 단절된다.
그는 더 이상 ‘나’라는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이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통은 존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불안과 슬픔, 욕망과 결핍 —
이 모든 감정은 인간을 괴롭게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
감정의 진공 속에서 우리는 완벽히 안정된 기계가 되지만,
그 순간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진동을 잃는다.
결국 인간은 결핍의 존재다.
결핍을 느낄 때만 사랑할 수 있고, 고통을 느낄 때만 성장할 수 있다.
감정은 결핍의 언어이며, 존재가 세상과 맞닿는 가장 마지막 감각이다.
감정을 잃은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를 잃는다.
그는 살아 있지만, 더 이상 ‘살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