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욕망한다.
욕망이 사라지면 사유도 사라진다.
모든 사유의 뿌리는 ‘결핍’이며, 결핍이란 곧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욕망은 몸의 언어이고, 사유는 그 언어를 번역한 정신의 문법이다.
따라서 철학의 시작은 금욕이 아니라, 욕망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욕망은 사유의 적이 아니라, 사유의 모태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을 육체의 한 기능으로 보았다.
그에게 정신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몸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철학은 금욕이 아니라, 욕망을 “힘의 상승”으로 바꾸는 기술이었다.
그가 경계한 것은 욕망이 아니라, 욕망이 방향성을 잃는 상태, 즉 낭비였다.
니체에게 ‘현자’란 욕망을 버린 자가 아니라, 욕망을 변형시켜 사유로 만든 자다.
욕망이 생리적 충동으로 남아 있을 때 인간은 노예이지만,
그 욕망을 사유로 전환할 때 그는 창조자가 된다.
니체의 초인은 바로 이런 에로스의 전환자다 —
쾌락의 에너지를 힘의 형이상학으로 끌어올리는 존재.
욕망이 충족된 뒤, 인간은 일시적으로 ‘욕망 없는 상태’에 들어간다.
대부분은 그것을 허무로 경험하지만, 어떤 이는 그 순간에 세계의 투명함을 본다.
그것이 일종의 현자타임이다.
욕망이 잠잠해진 자리에 메타적 의식이 생긴다.
그때 인간은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 보지 않고, 욕망의 관찰자로 본다.
이 짧은 공백 속에서 ‘나’는 욕망 이전의 나를 바라본다.
그 자각이 철학의 시작이며, 니체가 말한 ‘모든 가치의 재평가’의 감각이다.
즉, 현자타임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욕망이 자신을 초월해 의식으로 변환되는 순간이다.
반대로, 간디의 금욕은 욕망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욕망의 방향을 바꾸었다.
욕망의 대상이 쾌락에서 인간으로,
몸에서 공동체로,
자기애에서 타자애로 이동한 것이다.
간디의 금욕은 욕망의 비물질화였다.
그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사랑으로 환원시켰다.
그의 금욕은 죽음이 아니라 확장된 에로스였다.
니체가 욕망을 힘으로, 간디가 욕망을 사랑으로 전환했다면,
둘 다 결국 리비도의 재배치자였다.
에로스는 단순한 성적 에너지가 아니라,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힘, 세계를 자기 안에 품으려는 의지다.
이 힘이 멈추면 인간은 사유를 멈춘다.
그러므로 철학은 언제나 욕망의 흔적 위에서 태어난다.
간디는 사랑을 설교하기 이전에,
욕망의 불길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한 인간이었다.
그의 금욕은 냉정한 절제가 아니라,
불타는 욕망이 인간 전체로 확장된 상태였다.
니체와 간디, 둘 다 욕망을 잃은 적이 없었다.
단지 욕망을 ‘개인적 쾌락’의 수준에서 ‘형이상적 에너지’로 변환시켰을 뿐이다.
욕망을 부정하는 인간은 사유를 잃고,
욕망에 휩쓸리는 인간은 방향을 잃는다.
진정한 인간은 욕망을 통해 자신을 초월한다.
니체는 힘으로, 간디는 사랑으로,
둘 다 같은 원천 ― 에로스의 순환 구조 ― 를 사용했다.
욕망은 인간을 어둡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만 사유는 빛난다.
결국 철학이란, 욕망을 견딜 줄 아는 예술이다.
욕망이 꺼진 자리에서, 인간은 잠시 신을 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