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불행한 이유가 ‘노력 부족’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이 땅의 사고 회로가 나와 맞지 않아서가 아닐까 하는 의심.
한국에선 생각이 다르면 설득하거나, 동조하거나, 침묵하거나,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다수의 리듬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무언의 명령이 공기처럼 떠다닌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나는 늘 약간의 지연과 어긋남을 느낀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어긋남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전제가 다른 세계들이 나란히 존재하는 불화다.
나는 질문이 다르고,
관계의 의미가 다르고,
사유의 출발점이 다르다.
대부분의 대화는 표면에서 멈추고,
나는 무심코 구조를 말한다.
그러면 분위기가 살짝 굳는다.
말을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다른 회로가 스파크를 일으킨 것뿐이다.
한국에서 ‘다르다’는 건 종종 ‘설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내가 설명될 필요 없는 공간을 원한다.
이해해달라는 바람이 아니다.
존재 방식이 굳이 번역되지 않아도 되는 장소,
나의 구조가 그대로 살아 숨 쉴 수 있는 느슨한 세계.
어쩌면 그래서 이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를 억지로 주파수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장소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
내 생각이 특이해서가 아니다.
나는 단지 ‘나’로 살아 보고 싶은 것이다.
동양적 사고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방식 아래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엮고, 안전을 만들고, 책임을 나눈다.
그러나 그 구조 속에서 나는 유난히 의식이 깨어 있고,
그 깨어 있음이 때로는 피로를 만든다.
‘함께’라는 말이 아름답지만,
어딘가에서 나를 지우는 부드러운 칼날이 지나간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행복이란 결국 자기 리듬이 허용되는 장소에서만 가능하지 않은가.
숨이 억지로 맞춰지지 않고,
침묵이 결함이 아니며,
사유가 너무 길어도 비난받지 않는 곳.
사람은 자신이 속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만 성장한다.
나는 내 방식이 틀렸다고 느끼지 않는다.
나는 단지,
지금까지 살아온 토양이 내 뿌리의 형태와 맞지 않는 것 같을 뿐이다.
언젠가 나는 그런 곳에 가고 싶다.
내가 설명이 아니고,
정답이 아니고,
의도가 아니고,
그냥 있음 그 자체로 이해되는 세계로.
그곳에서라면,
나는 더이상 어긋남을 느끼지 않고
조용히, 그러나 깊이
나의 속도로 피어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