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권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통령, 국회, 선거를 떠올린다. 국민이 권력의 원천이라는 헌법적 진리, 투표와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체가 먼저 마음에 그려진다. 그러나 현실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나라에서 진정한 권력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재벌, 세습된 경제 권력이다. 정치권력은 5년이라는 유한한 시간 동안만 존재하고, 교체될 수 있지만, 재벌 권력은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 대통령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어도 총수 가문은 여전히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을 유지한다. 한국 사회에서 ‘선출된 권력’이 최고 권력이라는 상식은, 이렇게 보면 허상에 가깝다.
이 불균형은 단순한 구조적 특이성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박정희 시대 이래 발전국가 모델 속에서 국가와 재벌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공진화해왔다. 국가는 재벌을 육성하고, 재벌은 국가 성장의 엔진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효율성이 서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선출된 권력은 재벌과의 협상 테이블 위에서 점점 협소한 선택만을 가지게 되었다. 재벌이 투자하지 않으면 경제가 흔들리고, 정치적 결정은 사회적 혼란과 직결된다. 결국, 정치권력은 자본의 투자 의사와 경제적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기술적 장치가 되어버렸다.
재벌은 단순한 기업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고용과 수출, 기술 투자와 외교적 연계까지 장악하며, 언론과 문화의 일부를 포획함으로써 경제적 권력을 문화적 헤게모니로 전환한다. 총수가 잠시 구속될 수는 있지만, 결국 돌아온다. 감옥은 권력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화와 세탁의 장치에 불과하다. 그들의 권력은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살아남고, 오히려 경제적 불확실성을 무기로 정치권을 흔든다. 정치가 재벌에 휘둘리는 구조는 ‘국가가 기업을 키웠다’는 전통적 담론을 전복시킨다. 이제 국가가 재벌의 의사에 따라 정책을 조정하고, 경제 안정과 투자 유치를 이유로 규제의 수위를 조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선거가 아무리 민주적 절차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실제 권력은 경제적 상수 앞에서 무력하다.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고, 내용은 재벌의 세습과 경제적 지배 앞에서 제한된다.
한국 현대 정치체제를 분석하면, 전통적 대표민주주의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재벌-국가 공진화 체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선출권력은 5년 주기라는 시간적 제약과 제한된 경제정책 자율성을 가지지만, 재벌은 세습성과 경제적 인프라 지배를 통해 장기적 권력 지위를 유지한다. 이러한 비대칭적 지속성, 언론 및 자본 네트워크, 그리고 국가 경쟁 논리 속에서 형성된 ‘경제 귀족제’는 민주주의 구조와 충돌한다. 한국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재벌형 경제 귀족제가 중첩된 하이브리드 권력체제인 것이다.
이를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검토하면, 몇 가지 중요한 구조가 드러난다. 먼저 발전국가론적 관점에서, 한국 국가는 재벌과 함께 전략 산업 중심 경제성장을 추진하며 국가-기업 공진화를 이루었다. 국가와 재벌은 서로를 필요로 했으며,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효율성은 서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자본권력론적 관점에서 보면, 재벌은 단순한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구조에 내재화된 권력층이다. 국가는 중립적 관리자가 아니라, 자본 축적을 보호하는 장치가 된다. 헤게모니 이론을 적용하면, 재벌의 미디어·광고 지배는 경제적 권력을 사회적 정당성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형 권력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과 국회는 선거 기반, 단기적 지속성을 가진 선출권력이고, 관료 엘리트는 내부 승진 기반, 중장기적 지속성을 가진 기술관료적 권력이다. 반면 재벌 총수는 지분과 가문 기반, 사실상 영속적 지속성을 가진 경제권력이다. 민주주의 제도가 존재하지만, 경제권력의 세습성과 사법적 면역력은 왕조적 특성을 띤다. 이 구조 속에서 선출권력은 재벌 권력의 전략적 선택과 경제 안정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작동하며, 개혁 의지는 구조적 제약 속에서 제한된다.
실제 사례를 보면, 재벌 총수 구속과 복귀 패턴은 이 구조를 보여준다. 총수가 구속되어도 경제 불확실성 프레임이 형성되며, 결국 사면과 복귀를 통해 권력은 유지된다. 금융·언론 시스템 역시 재벌의 영향 아래 포획되어 있으며, 정치적 담론과 여론 형성에도 재벌 권력이 반영된다. 따라서 선출권력은 재벌과의 협상 속에서만 정책을 실행할 수 있으며, 재벌 투자와 경제 안정은 정치적 결정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적 질문이 제기된다. 국민주권은 여전히 실질적 권력을 가지는가? 선거 민주주의는 경제권력과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정치권력이 자본에 종속될 때, 민주주의는 단순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한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선거가 없는 곳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선거가 권력을 제한당할 때, 즉 경제권력과 정치권력 사이의 균형이 깨질 때 발생한다. 한국은 선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귀족제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권력체제에 서 있으며, 정치가 재벌을 통제하지 못할 때 국민주권은 공허한 선언이 된다.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는 명확하다. 재벌을 단순히 비판하거나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 권력의 구조적 재편과 민주적 재구성이 필요하다. 권력의 세습과 경제적 집중이 지속되는 한, 국민주권은 공허한 선언에 불과하며 정치적 결정은 항상 경제권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사회라면, 그 첫걸음은 권력의 장기적 지속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문제 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정치와 경제의 비대칭적 권력 구조를 이해하고, 그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를 성찰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