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관세 협상을 잘 해냈다는 뉴스가 쏟아질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정치인은 자신들의 실력을 자랑하고, 언론은 “외교적 승리”라는 현수막을 흔든다.
인터넷은 박수와 애국적 수사로 넘실거렸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아무 말 없이 뉴스를 닫았다.
기뻐하지 못한 사람은 나뿐이었을까.
아니면, 어딘가 말없이 숨을 고르는 사람들이 있을까.
환희가 가득한 풍경 속에서, 나는 오히려 오래된 쓴맛을 느꼈다.
그 맛은 비굴함이 아니라, 의식의 통증에 가깝다.
마치 동네 일진에게 매일 털리던 아이가
어느 날은 점심값을 덜 빼앗겼다고
돌아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장면과 닮았다.
“오늘은 많이 안 맞았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친구들은 말한다.
“와, 너 진짜 잘 버텼다. 대단하다.”
그 축하의 목소리가 따뜻할수록,
어딘가 심장의 한 귀퉁이가 서늘해진다.
기쁨이 아니라 존엄에 대한 감각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가끔,
거대한 힘 앞에서 덜 굴복했다는 사실을 승리라 부르곤 한다.
우리의 근대는 늘 거인의 그림자 속에서 완성됐고,
주체성보다 생존의 균형감각이 미덕으로 찬양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생존 기술마저
성취의 언어로 둔갑한다.
나는 우리가 자라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부심이 아니다.
정말로 자유롭고자 했던 욕망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덜 종속된 것을 ‘독립’이라 부르고,
덜 치욕스러운 것을 ‘영광’이라 칭찬한다.
물론 현실은 냉혹하다.
경제는 힘의 논리로 움직이고,
국가 간 협상은 숫자와 산업, 군사력과 외교력의 방정식이다.
이 나라가 위태로운 지정학 위에 서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이번 관세 협정은 기술적으로 훌륭했을 것이다.
그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잘 넘긴 것을,
잘 바꾼 것을,
덜 맞은 것을 기념하며 흥분하는 순간,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아니면
어릴 적부터 너무 많이 맞아와서
덜 맞는 법을 배운 것일 뿐인가?
자립을 꿈꾸기보다
종속의 기술을 세련되게 다듬는 것,
그것이 이 시대의 ‘성공’이라면
과연 어디까지가 진보이고
어디서부터가 체념일까.
나는 축제 속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이 감정은 패배도 아니고, 염세도 아니다.
그저 오래된 상처가
기억 속에서 다시 한번 만져진 것뿐이다.
우리는 언젠가 정말로
누구에게도 존재를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날을 맞을 수 있을까.
외부의 협상이 아니라,
내부의 주권으로 서 있는 날.
덜 맞는 법이 아니라,
맞지 않아도 되는 세계.
나는 그 날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날이 오지 않았음을,
이 씁쓸함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언젠가 우리는
덜 빼앗겨 기뻐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품고 있는 한
나는 오늘의 환호 속에서도
조용히 느낄 것이다.
금속처럼 차고 단단한,
그 씁쓸한 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