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수치를 사랑한다.
나이, 학력, 키, 연봉, 재산.
숫자로 줄 세울 수 있는 것들은
마치 그것이 인간의 총합인 양,
측정 가능성을 권위의 형태로 세운다.
그러나 지능은 다르다.
지능은 숫자처럼 가지런히 놓이지 않는다.
아이큐라는 장치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깊이를 재기 위한 얕은 자,
사유의 체온을 잴 수 없는 온도계에 불과하다.
진짜 지성은 기능보다 방향의 문제다.
문제를 푸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붙들고 사는가의 문제다.
높은 지능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돈과 성취가 아니라
사유의 미세한 진동에 중독된다.
그들은 생각한다는 행위를
최고의 쾌락으로 경험한다.
문제는,
이 세계가 그런 쾌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성과를 원하고,
그 성과는 수치로 증명되어야 한다.
사고의 농도, 통찰의 결,
내면의 확장과 우주의 감각은
엑셀 셀 위에 붙지 않는다.
그래서 고차원적 사고를 가진 이들은
종종 세상과 불화한다.
그들은 단순할 수 없고,
많은 것을 본 눈은 다시 흐리게 볼 수 없다.
의심은 호기심이 되고,
호기심은 진실을 추구하다가
어느새 고독에 닿는다.
그 고독은 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공간이다.
세상은 그들을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적응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지능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을 전부 계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지성은 줄 세울 수 없을 때 빛나고,
계량되지 않을 때 살아 있다.
숫자가 지배하는 시대에
측정되지 않는 감각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불화이며 동시에 자유다.
누군가는 그 자유를 미술관의 고독처럼,
또 누군가는 진실이라는 유일한 사치로 견딘다.
우리는 결국,
세상이 요구하는 지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질문으로 정의되는 존재다.
그리고 그 질문이 깊을수록
세상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자기 우주로 이동해 간다.
그 우주에는 성취 대신 심도가 있고,
명성 대신 명료함이 있으며,
경쟁 대신 사유가 흐른다.
측정되지 않는 자들에게 건배하자.
그들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르게 존재하는 법을 선택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