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직선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곧고 단순한 궤도를 따라 걸으며, 이미 정해진 의미와 검증된 행복 안에서 안정을 누린다. 사회가 그려놓은 선형의 지도를 따라가며, 마치 질서라는 따뜻한 담요 속에서 잠드는 듯이. 직선은 늘 목적지가 확실하고, 중간에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꾸준히 그 길을 간다. 평온을 얻고, 안정 속에서 행복을 품는다.
그러나 직선의 삶이 가진 단단함은, 동시에 진보를 거부한다.
직선은 길게 뻗지만,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그들은 멀리 가지만, 새로운 곳에 도달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걸어가는 길 위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 세계의 공기는 지나치게 일정했고, 풍경은 너무 완결되어 있었다.
나는 질서와 안전이라는 이름의 틈새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
“세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미세한 떨림을.
사람들은 가끔 내가 어딘가 어긋났다고 말한다. 아니, 내가 먼저 느낀다.
내가 낯선 방식으로 생각하고, 구조의 외곽선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있는 의미를 사용하는 사람이고,
나는 의미가 붙기 전의 세계를 만지려는 사람이다.
그들은 완성된 언어로 말하고,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문장을 더듬는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필요가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는 다른 회로, 다른 질감, 다른 중력을 따르기 때문이다.
예술가와 사유하는 자는 언제나 무거운 현실에 눌린다.
세상은 무덤덤한 평온 속에 머물고 싶어 하고,
대중의 감각은 변하지 않는 질서를 선호한다.
그곳에서 새로운 감각은 위협이 되고, 질문은 불안의 씨앗이 되며,
다르게 살아 보겠다는 시도는 ‘불필요한 교란’으로 규정된다.
나는 때때로 그 무게에 짓눌린다.
왜 나는 직선으로 살지 못하는가.
왜 남들이 행복해하는 자리에 서면,
나는 어딘가 답답하고, 공기가 얇게 느껴지는가.
왜 나는 고요한 날보다 흔들리는 밤을 더 정확히 기억하는가.
고독은 때때로 잔인하다. 그러나 그 고독이 없다면,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늘 비틀린 시선에서 출발했다.
익숙한 길 옆에서 홀로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던 그 몇몇이
세상의 경계를 조금씩 밀어냈다.
문명은 직선 위의 행진이 아니라,
곡선과 파동 속에서 태어났다.
사유는 늘 불편함을 숙주로 삼았고,
예술은 늘 고독의 혀로 세상을 핥았다.
직선의 사람들은 안정이라는 선물과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불안이라는 연료를 태우며 걷는다.
그러나 불안 속에서 나는 본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형식,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감정,
아직 말해지지 않은 세계가
내 안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직선 대신 곡선을 선택한다.
그 곡선은 때로 나를 흔들고, 길을 잃게 하고,
밤마다 스스로를 설득시켜야 하는 고독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곡선 위에서만
완성되지 않은 세계가 태어나고,
멈추지 않는 진보가 꿈틀거리며,
인간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공간이 열린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으로 살아가려 한다.
완성을 좇지 않고,
흘러가며, 질문하며, 흔들리며.
행복 대신 진화를 택하고,
평온 대신 생성을 택하고,
따뜻한 직선 대신 불확실한 곡선을 선택한 자의 운명을 기꺼이 감당하며.
그 길은 고독하지만,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새로움이 탄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