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받은 자의 형벌

by 신성규

재능의 분포는 정규분포가 아니다.

삶은 수학의 곡선처럼 공평하지 않다.

창의성, 추상 사고, 혁신 능력은 중심을 향해 모이지 않는다.

그것은 극단적 꼬리, 아주 먼 끝에 고립된 지점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극소수만이 높은 창의성을 가진다.


대다수는 평균 근처에 머무른다.

평균적 능력, 사회적 규범 속 적응, 반복과 규칙의 안정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얻는다.

평범이 그들에게는 배신이 아니다.

그들은 평온을 누린다.

자기 기대와 현실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단에 서 있는 이들은 다르다.

높은 재능은 선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굴레다.

그들은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을 먼저 본다.

능력은 욕망이 아니라 예감으로 다가온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직관은

“아직은 할 수 없다”는 현실과 충돌하며 고통을 만든다.


재능이 높을수록 기대치도 높아지고,

그 기대는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내적 명령이 된다.

의미를 추구한다.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이 모든 요구가 압박이 되어 가슴을 누른다.


그래서 그들은 평범을 선택할 자유를 잃는다.

선택하지 않는다.

끌려간다.

자기 가능성이라는 운명에.


다른 사람들은 규칙 속에서 안도하고 안정한다.

일상을 쌓으며 삶의 충분조건을 삼는다.

그러나 높은 재능을 가진 자는 그런 질서 속에서 안식하지 못한다.

평범이 그들에게는 편안함이 아니라 배신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보고 말았다.

도달할 수 있는 상상을.

도달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만큼 선명한 미래를.

그 예감이 심판자가 되어

그를 안식으로부터 멀리 쫓는다.


그래서 그는 괴롭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감정이 아니라 사명감의 그림자다.

자기 내부의 기준에 의해 심판받는 존재의 운명.

높이 본 자의 고독.

평범으로는 결코 진정될 수 없는 목마름.


이 고통은 불행이 아니라 구조다.

시간과 현실과 자아가 맞물려 일으키는 긴장이다.

실현 속도가 느릴 때, 사회가 따라주지 않을 때,

세상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때,

그는 시간을 앞서 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처입는다.


그렇다.

능력은 축복이 아니다.

책임의 형태로 주어진 형벌이다.


하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이 길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가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을.

가능성을 알고 난 뒤에는

돌아갈 평온이라는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운명은 극소수에게만 고통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안다.


이 고통이 곧 자신의 길이라는 것을.


그래서 다시 걷는다.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부름과 두려움 사이에서.

그러나 단 하나의 결론만으로,


“나는 갈 수 있다. 그러므로 가야 한다.”


운명에 선택된 자는

결국 운명을 선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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