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법소년 폐지에 대하여

by 신성규

저녁 7시와 8시 사이.

코인세탁기의 회전음이 어둠 속에서 습도를 만들고, 건조기의 뜨거운 호흡이 좁은 공간에 무심히 퍼진다.

그 공간의 한 켠, 한 자리를 매일 차지하는 작은 아이.

눈동자는 쾡하고, 손가락은 기계처럼 게임 화면을 두드린다.

세상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지만, 그는 세상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 눈 속엔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접어둔 존재가 있다.

호기심도, 천진도, 어리광도 없는 얼굴.

아이는 이미 사회라는 심판대에 올라 있다.

누구도, 아무도, 아직 그를 심판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말한다.

“나는 이미 버림받았다”고.


우리는 종종 촉법소년을 논한다.

세상은 그들을 “악의 씨앗”이라 부르고,

어른들은 그들을 향해 징벌의 서사를 갈망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은 악의를 배워서 악을 흉내 낸다.

누군가에게서, 어딘가에서,

세계가 먼저 잔인하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묻고 싶다.

“그들이 언제 사랑받았는가?

그들이 어디서 배웠는가?

가르침이 없는 땅에 꽃이 피지 않는 것은

꽃의 죄인가, 토양의 결핍인가.”


세상은 죄책을 묻는다.

그러나 아이에게 책임 능력을 묻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책임 능력을 물어야 한다.

방치된 귀, 무심한 눈, 손을 뻗지 않은 어른의 세계 —

그것이 진정한 폭력이다.


촉법소년을 폐지하자고 외치는 목소리는

단지 법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어른의 폭력을 합법화하자는 요구다.

우리는 정의라는 이름을 빌려 복수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복수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향한 분노다.

사회를 돌보지 못한 죄책, 구조를 바꾸지 못한 무력감,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저 아이가 될 수 있었다는 공포.


나는 세탁방의 작은 아이를 떠올린다.

그는 범죄자가 아니다.

그는 징벌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에 서 있는 인간이다.


불행은 선택지가 없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폭력은 배움이 부재한 자리에서 태어난다.


우리가 미래를 심판할 때

미래는 되묻는다.


“우리는 당신에게 무엇을 배웠습니까?”


진정한 문명은

죄를 미리 단죄하는 사회가 아니라,

상처를 발견하고, 손을 내미는 사회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날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제 안다.

눈을 피해선 안 되는 얼굴들이 있다.

아직 세상을 믿지 못하는 작은 인간들.

그 아이가 우리였던 시절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죄를 지어 태어나지 않는다.

죄는, 우리가 가르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마음속에서 다짐한다.

단 한 아이라도

버려진 눈빛 대신, 기대의 눈빛을 가질 수 있다면 —

그것은 형벌보다 오래가는 정의다.

그것이 문명을 만든다.

그것이 인간을 구한다.

그것이 어른이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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