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철학이라는 학문

by 신성규

철학자들의 개념은 외울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핵심 개념만 이해하면,

그 철학자가 어떤 세계를 보았는지, 어떤 방향에서 사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철학은 암기의 학문이 아니라, 사유의 구조를 추적하는 감각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철학자를 ‘이론’으로 기억할 때, 그 사유는 죽는다.

그러나 그의 개념을 ‘시선의 구조’로 이해할 때, 그 사유는 살아난다.

예를 들어, 칸트를 외운다고 해서 “이성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에서 중요한 것은 문장의 복잡함이 아니라,

그 복잡함이 지향하는 하나의 질문 ―

“인간은 무엇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라는 구조적 태도다.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성비판’을 외우는 게 아니라,

‘모든 이론의 바깥에 있는 한계’를 자각하는 훈련이다.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의 언어는 난해하지만, 핵심은 단 하나의 전환에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물음으로써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드러내고 감추는가를 탐구하는 시선.

그는 우리에게 사유의 기술이 아니라, 사유의 존재 방식을 남겼다.

하이데거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묻는 방식으로 나 자신을 다시 본다”는 태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하이데거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니체는 또 다르다.

그는 철학이 논리가 아니라 혈관의 뜨거움으로부터 태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명제가 아니라 폭발이다.

그 문장은 외워질 수 없고, 오직 체험될 수 있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면, 우리는 세계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힘의 흐름으로 구성된 공간임을 직감한다.

그때 철학은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삶을 직면하는 하나의 감정, 하나의 운동으로 변한다.


결국 철학자는 개념으로 남는 존재가 아니라, 시선의 구조로 살아 있는 존재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만,

그들이 진짜로 남긴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사유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사유의 구조를 감염받는 일이다.

그 감염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철학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철학의 공부란, 사실상 기억의 기술이 아니라 망각의 기술이다.

우리는 외운 개념을 잊고, 그 개념이 태어난 배경을 본다.

철학자들이 남긴 문장은 ‘완성된 답’이 아니라 ‘사유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식이다.

그들이 세운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바라본 시야의 각도를 감지해야 한다.


플라톤은 영원을 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의 질서를 향했다.

스피노자는 신을 기하학으로 바라봤고,

데카르트는 의심을 통해 확실성을 세웠다.

그들의 철학을 모두 외울 필요는 없다.

단지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방향의 벡터를 읽으면 된다.

그 벡터를 이해하면, 나머지는 추론으로 따라온다.

철학은 기억으로 쌓이지 않는다.

철학은 직관으로 자라난다.


지식은 닫힌 체계지만, 사유는 열린 운동이다.

철학자들의 개념을 하나하나 외우는 것은

정원을 지도 위에 복제하는 일과 같다.

그러나 그들의 사유의 결을 느끼는 일은

그 정원을 직접 걸으며, 바람의 방향을 느끼는 일이다.


철학이란 결국, 사유의 바람을 감지하는 예술이다.

이름을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핵심은 그 이름을 낳은 시선의 구조,

그 구조를 낳은 내면의 긴장,

그리고 그 긴장이 나에게 어떻게 옮겨오는가다.


철학자는 ‘지식의 주체’가 아니라 ‘시선의 생성자’다.

그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기록이고,

그들의 사유를 따라가는 것은 체험이다.

암기는 기억을 만든다.

그러나 이해는 시야를 만든다.


그러므로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철학자들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유의 궤적 속에서

‘나 자신의 사유 구조’를 발견하는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