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천재’라 불리는 사람에게 학문을 시켜보라.
학문은 구조를 주고, 규칙을 주고, 정합성을 요구한다.
그 기준 안에서 누군가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뛰어남은 결국 질서의 연장선 위에서만 작동한다.
나는 오히려 창조가 나오려면
사유에 미세한 분열, 즉 분열증적 기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임상적 의미의 정신병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은
세계가 당연하게 보이지 않는 감각,
언어가 완전하지 않다는 느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관습적 질서를 믿지 못하는 기질
—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나의 세계를 인정하는 대신,
세계가 겹겹의 층으로 보이고,
사고의 선들이 서로 엇갈리고,
현실과 관념 사이의 경계가 다른 사람들보다 느슨하게 보이는 능력.
그 능력이 ‘분열증적’이다.
그리고 그 느슨함, 그 틈이 바로 창조의 싹이다.
높은 지능은 규칙을 빨리 이해하고,
논리를 정확하게 복제하며,
기존의 패러다임 안에서 최적의 답을 찾는다.
그래서 ‘천재’는 기존 체계 내에서는 놀라운 성취를 보인다.
하지만 창조는 기존 체계의 바깥에서 일어난다.
창조적 발명은 논리의 연속이 아니라,
논리의 끊김에서 나타난다.
지능은 타고난 기울기이지만,
창조는 기울기에서 벗어나는 능력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스키조는 새로운 접속을 만든다”고 말했다.
정상적 사고는 선형 구조—원인에서 결과로 흐른다.
그러나 스키조적 사고는
의미가 다른 층위에서 연결되고,
비약이 발생하며,
서로 무관한 것들이 갑자기 접속된다.
그 비약이 바로 은유이고,
그 접속이 바로 발명이고,
그 불규칙이 바로 창작이다.
즉, 창조성이란 세계를 한 번 더 비틀어 보는 능력이다.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잡음처럼 보이는 것이
창조적 자에게는 새로운 패턴으로 보인다.
모든 창조의 시작에는 ‘정상성의 균열’이 있다.
철학자는 세계를 의심함으로써 탄생하고,
예술가는 세계를 왜곡함으로써 탄생한다.
과학자는 기존 체계를 불신함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다.
그 모든 행위가 일종의 분열증적 시선이다.
세상을 그대로 보는 대신,
세상을 ‘깨진 유리조각’처럼 본다.
그 깨진 조각의 틈으로
새로운 시선이 들어오는 것이다.
‘정상적인 정신’은 세계를 안정시키고
규칙 위에서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파열된 정신은
세계의 틈을 본다.
그 틈에서
다른 질문,
다른 리듬,
다른 세계가 태어난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창조적 영혼은 완전히 안정된 자가 아니라,
어딘가 조금 비틀린 자,
어딘가 균열이 있는 자,
세계와 어긋난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지능은 재능이다.
그러나 창조는 틈이다.
그 틈을 가진 사람들 —
조금 어긋난 자,
조금 예민한 자,
조금 과도하게 감각하는 자,
조금 세계에 맞지 않는 자 —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여는 존재들이다.
창조는 광기와 분열의 그림자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그림자 덕에 가능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