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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피학성에 대하여

by 신성규

사랑을 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

그 내어줌 속에는 언제나 상처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상대가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한다.

이 모순된 행위, 즉 스스로 상처받을 수 있는 권리를 타인에게 주는 행위야말로

사랑의 본질적 피학성이다.


사람은 사랑할 때, 자신이 강하다는 환상을 내려놓는다.

이성의 무장은 느슨해지고, 논리는 감정의 열기에 녹아내린다.

사랑은 타인에게 무력하게 노출된 상태로 존재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 무력함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한 독립체가 아니라,

언제나 관계 속에서만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지배가 아니라 항복이다.

우리는 사랑할 때, 이기려 하지 않고 이해받으려 한다.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이해받고자 애쓰는 그 마음 자체가

사랑의 피학적 구조를 보여준다.

사랑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지만, 그 나약함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용기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넨다는 것은

그가 언제든 그것을 부서뜨릴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내어주는 일이다.


사랑의 고통은 우연이 아니다.

고통은 사랑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리움, 불안, 질투, 상처—이 모든 감정은 사랑의 그림자이며,

그림자가 없다면 빛 또한 없다.

우리가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사실상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고통이 사라진 사랑은 이미 소멸했거나,

아직 진짜로 시작되지 않은 사랑이다.


사람은 사랑 속에서 일종의 피학적 쾌락을 경험한다.

이 쾌락은 단순한 고통의 즐김이 아니다.

그것은 “너에게 지배당함으로써 내가 존재함을 느끼는”

역설적 감정이다.

자아가 타자에게 침투당하면서, 오히려 자아는

이전보다 더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는 나를 흔들고,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나의 실체를 본다.

사랑은 자아의 파괴이자, 동시에 재구성이다.


사랑의 피학성은 때때로 광기로 보인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잃고, 자존심을 버리고,

상처를 알면서도 다시 그리움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이 광기는 결코 병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진심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욕망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존재론적 열망의 형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나라는 경계가 타자에게 스며드는 사건”이다.

그 사건이 일어날 때, 인간은 자발적으로 약자가 된다.


사랑은 결국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고통이다.

그 고통이 없다면, 사랑은 그저 편안한 합의나 일시적 환락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랑 속에서만 진짜 인간이 된다.

왜냐하면 그때만이 우리는, 상처받을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자유란 완전한 통제의 부재가 아니라,

자신이 부서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용기다.

사랑은 바로 그 용기의 가장 인간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사랑을 할 때, 피학적이 된다.

하지만 그 피학성은 결코 굴욕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줄 만큼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사랑은 약자의 감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틸 만큼 단단한 이들의 의식이다.

그들은 사랑 속에서 아프고, 무너지고, 때로는 미쳐가지만

그 모든 감정의 깊이 속에서

인간 존재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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