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현대인의 공감능력 역행에 대하여

by 신성규

모든 인간은 이해 가능하다.

왜냐면 그들의 조각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간디도, 내 안에 있다.

그 말은 곧 인간의 선과 악, 연민과 잔혹함, 사랑과 증오가 분리된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 안에 서로 엉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이란, 그 복합성을 외면할 때마다 자신이 만들어낸 악에 놀라는 존재다.


우리는 악인을 보고 분노한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악마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마지막 통로를 닫는다.

히틀러의 악은 비정상적인 ‘괴물’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열망과 공포, 피해의식 위에 세워진 인간이었다.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능했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구조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는 ‘절대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절대적 상처를 가진 인간만이 존재한다.

공감이란 바로 그 상처의 언어를 해독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공감을 실패하고 있다.

공감은 약자의 감정, 혹은 감성적인 사람들의 특성으로 오해받는다.

현대는 효율을 우선시하는 문명이다.

기업은 공감 대신 수익을, 정치인은 공감 대신 표를 계산한다.

공감은 전략에 방해가 되고, 이해는 속도를 늦춘다.

그리하여 오늘의 리더들은 감정적 민감함을 결함으로 간주하고,

공감 없는 결단력을 미덕이라 부른다.


문제는, 그렇게 형성된 ‘비공감형 사회 구조’가

인류의 진화를 역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공감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를 넘어서, 집단적 인식의 진화를 이끌어온 에너지였다.

원시 공동체에서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이 태어났다.

그 공감이 서로를 지켜보게 만들고,

법과 도덕, 예술과 언어, 문명이 형성되었다.

공감은 단지 남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류를 연결하는 가장 근원적인 신경망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신경망은 점점 끊어지고 있다.

SNS는 연결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분노를 확산시킨다.

정치는 공감을 연기하지만, 이해를 회피한다.

기업은 ‘고객 감동’을 말하지만, 노동자의 피로에는 눈을 감는다.

우리는 서로를 보지만, 서로의 내면을 듣지 않는다.

이 세계는 공감의 피로감 속에서 무감각하게 흘러가고 있다.


공감이 결여된 사회의 특징은 명확하다.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단죄하거나 조롱한다.

악을 보면 분노하지만, 그 악을 만들어낸 구조를 성찰하지 않는다.

인간을 개인의 도덕성으로만 판단하고, 맥락을 지워버린다.

그래서 다시 악을 생산한다.

공감이 사라지면 사회는 복잡한 인간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단순한 이분법—선과 악, 성공과 실패, 나와 남—으로 퇴행한다.

그 안에서 인류의 정신은 점점 더 얕아진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인류 전체가 조금만 더 공감능력이 높았다면,

세계는 훨씬 덜 잔인했을 것이라고.

전쟁은 명예보다 상처를 먼저 인식했을 것이고,

정치인은 상대의 표정보다 국민의 삶을 먼저 보았을 것이며,

기업가는 경쟁자의 실패에서 쾌감을 느끼기보다,

그 실패가 무엇을 말하는지 들으려 했을 것이다.

공감은 세상을 부드럽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을 더 깊게 만든다.

공감은 인간의 고통을 단순히 위로하지 않고,

그 고통의 구조를 통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내 안에서 발견하는 일은 불쾌하다.

하지만 간디를 내 안에서 발견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왜냐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양극의 존재,

즉 선과 악, 이성과 충동,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품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을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악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악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 이해는 감상적 동정이 아니라,

인간을 ‘전체’로 인식하려는 가장 높은 단계의 의식이다.


공감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나는 너의 일부를 나 안에서 본다.”

그 단 한 문장이 인간 문명을 지탱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인간은 자신이 타인과 닮았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내부에서 타인의 고통을 느낄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이 사라진 자리에 ‘정의의 흉내’만 남았다.

우리는 서로를 규탄하면서도,

그 규탄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자기혐오를 보지 못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인간을 파괴하면서,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 기억을 되풀이한다.


이제 인류는 다시 공감을 배워야 한다.

AI나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미래가 아니라,

공감 없는 인간이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가 더 두렵기 때문이다.

공감은 생존의 감정이 아니라,

문명이 유지되기 위한 정신적 생태계의 핵심이다.

공감 없는 사회는 숫자로는 성장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퇴화한다.

그 퇴화는 서서히 도덕을 마비시키고,

결국 인간을 효율적인 도구로 전락시킨다.


모든 인간은 이해 가능하다.

그 말은 세상의 악이 모두 정당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악조차 인간의 구조 안에서 해석 가능하다는 희망이다.

공감은 그 해석의 언어이며,

공감이 끊어지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도덕 이전의 감정, 법 이전의 직관,

그리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눈이다.


히틀러도, 간디도, 내 안에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를 이해하려 한다.

그때 인류는 다시 한 단계 성장한다.

공감은 진화의 끝이 아니라, 진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시작을 믿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악마화를 넘어서는 인류의 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