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산다는 것

by 신성규

나는 오래도록 평범하게 사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해왔다. 그 생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칭찬의 형식을 빌려 들어왔다. 어릴 때 들었던 “넌 남다르다”는 말은 격려였지만 동시에 방향 지시였다. 그 말은 나를 위로 끌어올리는 것 같았지만, 실은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다. 평균이 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배신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삶을 선택의 연속이 아니라 검증의 연속으로 이해했다. 월 200만 원이나 300만 원을 벌며 조용히 사는 삶은 충분히 존엄하고 안정적일 수 있음에도, 내 기준 안에서는 어딘가 모자란 것으로 분류되었다. 그 삶이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지 않는 삶은 낭비라고 배웠다. 낭비는 곧 실패였다.


지금 돌아보면, 문제는 능력 자체가 아니라 능력과 존재를 동일시한 데 있었던 것 같다. 능력은 본래 도구다. 사고력이 빠르거나 구조를 잘 읽는 능력은 사용하면 유용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잠시 멈춰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도구로 두지 못했다. 나는 능력을 나의 본질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순간, 나는 내 존재가 축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성취가 줄어들면 존재의 밀도도 함께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에 묘한 우월 욕구가 더해진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남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허영심이라기보다, 나의 고독을 설명해주는 논리처럼 작동한다. 생각이 빠르거나 관심사가 다를 때 느끼는 거리감은 종종 고립으로 이어진다. 그 고립을 견디기 위해 “나는 사고의 층위가 다르다”는 해석을 붙인다. 그러면 외로움은 상처가 아니라 높이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이 해석을 유지하려면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한다. 멈추는 순간, 고독은 다시 아무 의미 없는 소외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내가 평범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정말로 능력을 못 쓰기 때문일까. 아니면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까. 만약 내가 평균적인 수입을 벌며, 조용히 하루를 살고, 관계 안에서 웃고, 스스로 만족을 느낀다면, 그 삶은 정말 실패일까.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공식이 잘못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성취와 직접 연결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계와 일상의 만족, 반복되는 안정 속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반면 나는 성취의 크기로 자신을 측정해왔다. 이 차이는 단순한 야망의 차이가 아니라 가치 평가 모델의 차이다. 나는 늘 잠재력을 기준으로 현재를 재단했고, 그 기준에 못 미치면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러는 사이 현재의 충만함은 자주 사라졌다.


위대해지고 싶은 욕망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자유에서 나온 선택인지, 아니면 불안에서 나온 강박인지에 있다. 내가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이 즐거움 때문이라면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면 존재가 무너질 것 같아서라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어쩌면 낮은 곳에 머문다는 뜻이 아니라, 비교의 축에서 내려오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는 능력을 쓰지 않아도 존재가 흔들리지 않는다.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 나는 아직 그 지점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 여전히 내 안에는 “더 높이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하루를 충실히 사는 사람들이 결코 실패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어쩌면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위로 올라가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와 성취를 분리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특별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확신. 능력을 전부 쓰지 않아도 낭비가 아니라는 이해. 그 이해가 자리 잡는다면, 나는 비로소 능력을 강박이 아니라 선택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평범함은 실패가 아니라 또 하나의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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