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사랑의 비유로 처음 떠올린 것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본 이후였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란 물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은 형태가 없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특정한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는 감정, 규정될 수 없는 가능성처럼 느껴졌다. 인간과 괴물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그 장면들은, 사랑이란 결국 정상성이라는 틀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을 내 안에 남겼다.
당시 내가 떠올린 물은 순응의 은유가 아니었다. 오히려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미지에 가까웠다. 사회가 허용하는 사랑과 그렇지 않은 사랑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선들, 아름다움과 기형, 이해 가능함과 이해 불가능함을 나누는 기준들. 물은 그 모든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존재처럼 보였다. 어떤 사랑도 배제하지 않고, 어떤 존재도 거부하지 않는 상태. 그래서 나는 사랑이 물과 같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 속에 또 다른 전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늘 어떤 공간 안에 놓인다. 물은 경계를 넘지만, 여전히 형태를 규정하는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나는 사랑을 다양성의 가능성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이 관계라는 틀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사랑은 경계를 해체하지만, 완전히 무경계의 상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두 존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사랑은 나에게 위험한 감정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사람을 부드럽게 만들지만, 그 부드러움은 때로 자신을 흐릿하게 만든다. 사랑은 서로를 이해하게 하지만, 그 이해는 때로 자기 존재의 윤곽을 희미하게 한다. 사랑이 모든 형태를 허용하는 감정이라면, 우리는 어디까지 자신을 지켜야 하고 어디까지 흘러가야 하는가. 그 질문은 나를 오래 붙잡았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사랑은 한쪽이 물이 되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가 물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누군가가 그릇이 되고 다른 누군가가 그 안에 담기는 관계는 결국 균형을 잃는다. 형태를 규정하는 쪽과 형태에 맞추어 변하는 쪽이 나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물이 된다면 관계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흐름이 된다. 그 흐름 속에서는 정상성이라는 기준도, 관계의 정답도 점점 의미를 잃어 간다.
이때 사랑은 ‘좋아할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유는 언제나 조건을 만들고, 조건은 사랑을 평가의 대상이 되게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랑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부정된다. 그러나 물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를 감싸며 흐를 뿐이다. 사랑 역시 그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선택 이전의 상태가 된다.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태도. 논리로 정당화되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속시키는 힘.
물은 완벽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단단함은 경계를 만들지만, 유연함은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물은 돌을 깨뜨리지 않는다. 다만 오랜 시간 곁에 머물며 그 거친 표면을 자신의 흐름 속에 포함시킨다. 사랑도 그렇다.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서로의 세계가 조금씩 섞이도록 시간을 허락하는 일. 그것은 정복이 아니라 지속의 방식이며, 설득이 아니라 경험의 축적에 가깝다.
그래서 이제 나는 사랑을 형태가 없는 상태로 이해한다. 형태가 없다는 것은 공허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형태에도 갇히지 않는 자유를 의미한다. 서로가 서로의 경계가 되지 않고, 서로의 흐름이 되는 관계. 그 관계 속에서는 누가 더 옳은지, 누가 더 많이 변했는지 따지지 않는다. 다만 함께 흘러가며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낸다. 때로는 멀어지고, 때로는 다시 만나며, 그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생명처럼 이어진다.
어쩌면 사랑은 물이라는 완성된 비유가 아니라, 서로가 물이 되어 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단단했던 자아가 조금씩 풀리고, 익숙했던 세계의 기준들이 조금씩 흔들리는 과정.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감싸는 법을 배우고, 동시에 자신을 잃지 않는 법도 익힌다. 사랑은 누군가를 닮아가는 일이 아니라, 함께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세계의 모양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