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는 왜 존재의 언어가 되는가?

by 신성규

누군가는 오늘도 성실히 자신의 하루를 ‘쌓는다.’

일을 하고, 기록을 남기고, 관계를 이어가며 미래를 만든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그 모든 것을 조롱하고 부수고 싶어 한다.

그는 물어본다. “그게 정말 너의 것이었어?”


나는 생산보다 파괴를 택하는 인간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는 게으르지 않다. 그는 실은 너무나 예민한 자아다.

쌓는다는 행위가 ‘편입’이라면, 그는 자기 존재를 위해 그 편입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체제를 부수는 것으로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구조에 들어선다.

학교, 가족, 국가, 노동.

이 모든 시스템은 ‘너의 자리’를 정해준다.

그 구조 안에서 성취는 곧 복종의 보상이 된다.


그렇다면, 생산은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창조’일 수 있는가?

혹시 우리는 구조가 허락한 틀 안에서, 가짜 건축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괴자는 여기에 ‘아니’라고 말하는 자다.

그는 쌓는 대신 부수는 행위로 존재를 선언한다.

그는 말한다. “내가 만든 게 아니면, 나는 그것을 무너뜨릴 권리가 있다.”


사회는 말한다. “그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하지만 금기의 배후엔 언제나 권력이 있다.

‘하지 마라’는 말은 결국, ‘우리가 정한 질서를 넘지 마라’는 명령이다.


니체는 ‘가치의 전도’를 외쳤다.

고통을 피하고, 체제를 따르며, 주어진 질서를 ‘선’이라 여기는 도덕을 해체해야 한다고.

그의 말처럼 파괴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를 위한 도약일 수 있다.


바타유는 더 나아간다.

그에게 금기 파괴는 쾌락이며,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이다.

우리는 ‘넘지 말라’는 선을 넘을 때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 본다.


생산이 불가능한 자는 무기력한 존재일까?

아니다. 그는 존재를 증명할 다른 언어를 찾는다.

그에게 파괴는 언어다.

아무도 듣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절규이며,

모든 구조화된 의미에 대한 물음표다.


나는 파괴자들을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들을 ‘이해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들은 실패한 자들이 아니라,

너무나 절실하게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자들이다.


그리고 때로는, 나 또한 그 마음이 된다.

모든 생산이 체제에 포획된 것처럼 느껴질 때.

내가 무엇을 만들든 결국 허용된 틀 안이라는 사실이 내 숨을 막을 때.

그때 나는, 파괴의 충동이야말로 가장 깊은 창조의 예비 단계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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