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말한다.
욕망은 고통의 근원이며, 해탈은 욕망의 소멸에서 비롯된다고.
특히 성적 욕망(카마)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 본능이자,
삶을 지속시키는 메커니즘이다.
붓다는 그것을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위대한 성자가 되었다.
그는 ‘욕망을 이긴 자’였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욕망을 이긴 자가 진정한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을 부정한 존재인가?
모든 생은 고(苦)로부터 시작한다.
불교는 이렇게 말한다.
탄생은 곧 집착의 결과이며,
삶은 윤회의 고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
이것이 바로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반출생주의(Antinatalism)의 사상이다.
탄생은 자의가 아니다.
삶은 고통이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해답이다.
그런데 붓다는 삶의 고통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욕망의 초월’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길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無)인가?
존재의 침묵인가?
욕망 없는 살아있는 시체인가?
이 질문이 핵심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가진 존재인가?
아니면 욕망을 넘어야 하는 존재인가?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말한다:
“리비도는 인간 행동의 원천이다.”
욕망은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되어야 한다.
예술, 철학, 사랑, 혁명 —
그렇다면, 붓다의 무욕은
문명의 끝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붓다는 말한다.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모두가 부처가 된다면,
아이를 낳을 이도,
사랑을 할 이도,
무언가를 갈망할 이도 없다.
세상은 욕망의 거대한 연쇄 속에서
생산되고 파괴되며
발전한다.
욕망 없는 사회는
불(佛)의 공동체인가,
생산 없는 무인도인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해탈은 욕망의 거부가 아니라, 욕망의 이해다.
욕망은 억압될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부처는 신이 아닌, 인간이 되려는 인간이었다.
그가 남긴 길은 완벽한 무욕이 아니라,
욕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힌트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믿는다.
우리는 욕망 속에서 태어나고,
욕망을 통해 자신을 찾으며,
욕망의 진실한 형태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