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인이 나를 이해하길 바라지 않는다.
사실, 이해라는 말은 언제부턴가 나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건 머리로 접근하는 방식이었고,
나는 언제나 마음으로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다.
사람들은 이해하려고 애쓴다.
설명해달라고 말한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때 무슨 감정이었는지.
그 모든 걸 알게 되면,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더 많이 설명을 요구할수록
나는 그들로부터 더 멀어졌다.
사람은 이해되어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은 본래 이해보다 먼저 느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었던가?
그 눈빛, 말투, 말하지 않은 말들 사이에 흐르던 공기,
그 모든 무언의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아닐까.
나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다.
해석당하지 않고, 느껴져서 읽히는 사람.
그 사람의 눈빛 안에서, 내 마음이 조용히 머무를 수 있는 사람.
논리가 아니라 리듬으로 전해지는 울림 같은 존재.
나는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서 설명 대신 여운을 남기고 싶다.
한 문장이 아니라
한 침묵의 결에서 나를 발견해줬으면 한다.
예술이 자주 망가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해’라는 말로 그 뜨거운 감정의 심장을 도려내기 때문이다.
그림은 기호로 분석되고,
시는 독해 문제로 평가되며,
음악은 코드로만 존재하고,
사람의 마음조차 구조도처럼 펼쳐진다.
그때마다 나는
예술이 아닌 차가운 병리학을 느낀다.
우리가 문장을 읽고 울컥하는 건,
그 문장이 정답을 말해줘서가 아니다.
그저 어떤 결,
어떤 리듬,
어떤 떨림이
우리 마음 속 고요한 방 하나를
살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저 흘러가기로.
나를 느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나의 가장 깊은 지층에 닿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며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사랑은,
이해가 아닌 느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