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배고프면 사유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스럽다. 생존의 위기 앞에서 인간의 뇌는 철학이 아니라 탄수화물을 갈망한다. 하지만 정작 더 이상 배고프지 않을 때,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사유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를 어지럽히는 질문이었다. 어째서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난 뒤조차, 자기 자신에 대해 묻지 않는가?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사유’가 필요 없는 구조 안에서 길들여져 왔다. 산업사회는 빠르게 돌아가는 시계태엽 속에 인간을 집어넣었고, 교육은 정답을 맞히는 기계로 인간을 세팅했다. 사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답을 품고도 살아남는 위험한 용기다. 세계와 자신을 다시 보려는 무례한 시도다. 그러니 체계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더 사랑한다. 잘 따라오고, 묻지 않고, 길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 이들에게 포만은 단지 배만이 아니라 생각의 포만, 감각의 마비를 가져온다.
나는 종종 배불러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낙심한다. 정서적 허기조차 잊은 얼굴들, 그저 ‘충분하다’는 착각 속에서 멈춰 선 이들. 그들의 포만은 일종의 자기기만이 아닐까. 생존은 끝났지만, 실존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누가 그들의 생각을 빼앗았는가. 누가 그들의 시간을, 불편함을, 자기 질문을, 열망을 빼앗아간 것인가.
생각은 아프다. 때로는 먹지 않는 것보다 더 배고프다. 하지만 사유는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고통을 떠안은 채 사유를 택하는 자만이 ‘의식 있는 존재’로 산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저주, 아렌트가 말한 내면의 대화는 결코 편안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이 불편한 길이 인간을 다시 깨어나게 할 유일한 가능성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