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은 대량생산의 시대를 열었다. 증기기관과 공장, 컨베이어벨트는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치환하며 생산량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 인류는 풍족해졌지만, 그 풍요가 곧바로 행복으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혁명은 부의 편중, 권력의 집중, 인간 소외를 동시에 낳았기 때문이다. 부유한 소수와 피로한 다수. 산업혁명은 풍요를 약속했지만, 공정함을 보장하진 않았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AI 혁명.
이 혁명은 대량생산이 아닌 ‘최적화’를 핵심으로 한다. 수요에 맞는 생산, 불필요한 낭비 제거, 시간과 비용의 최소화. AI는 효율의 극한을 추구한다. 산업혁명이 ‘더 많이 만들자’였다면, AI 혁명은 ‘딱 맞게 만들자’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다.
AI가 세상을 최적화하면, 인간은 더 행복해지는가?
나는 회의적이다. AI가 단지 기업의 비용을 줄이고, 생산을 더 빠르게 하며, 노동자들을 해고할 도구로만 쓰인다면 우리는 산업혁명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더 비참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육체뿐 아니라 지성마저 기계에게 내어주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이 육체 노동자의 자리를 앗아갔다면 AI 혁명은 지식 노동자의 자리까지 앗아갈 것이다.
진정한 AI 혁명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것은 노동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완전히 대체‘하는 로봇의 등장을 의미해야 한다. 인간이 생존을 위한 반복적 노동에서 벗어나, 사유하고 창조하고, 관계를 맺고 예술을 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AI를 인류의 진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적화만으로는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스템의 정비일 뿐이다. 혁명이란 인간의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AI는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하기 위해선, 기술 이상의 철학, 정치, 윤리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최적화된 지옥으로 진입할 뿐이다.
허나 가장 혐오스러운 현실은 이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자본가는 자리를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증기기관이 도입됐을 때도, 자동화 기계가 등장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 AI가 등장했을 때조차 자리를 잃는 것은 언제나 노동자였다. 기계는 인간의 자리를 빼앗았지만, 자본의 자리는 단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어떤 혁명도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도구의 교체일 뿐, 권력의 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는 있다. 그러나 AI가 자본의 권력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최적화된 불평등’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