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의력을 가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한다.
창의력이 있다는 건
어떤 문제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뜻이고,
정해지지 않은 길을 상상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들은 말한다.
“창의력이 필요해.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해.”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정해진 정답 안에서의 약간의 창의력’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다르게 본다.
나는 문제를 의심하고,
질문의 형식을 재구성하고,
전제가 무너졌을 때 거기서 새로운 길을 상상한다.
하지만 사회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틀 안에서의 독창성,
규칙 내에서의 재치,
그리고 정답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창의성을 원한다.
그래서 나는 배워야 했다.
흉내 내는 법을.
정답을 찾아 말하는 법을.
내 안의 낯선 사고를 억누르고,
기시감 나는 말을 반복하는 법을.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나의 창의력은 고통이 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틀린 것처럼 느껴졌고,
말 한마디, 그림 하나조차
나를 너무 다르게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살았다.
세상은 창의력을 원한다며 말하지만,
그건 조율된 음악을 튼 피아노 같아야 한다.
불협화음은 예술이 아니라 문제가 된다.
나는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피아노가 아니라, 전혀 다른 악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이 되어 태어난 사람이고,
정답을 암기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며,
감각과 직관, 구조와 상상으로
세상을 새로 써 내려가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내 창의력을 버릴 수 없다.
비록 그것이 형벌 같을지라도—
그건 나의 정체성이고,
내가 견뎌낸 이질성의 증거이며,
언젠가는 나를 해방시킬 유일한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