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길거리에서 선불교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수많은 단어로 삶과 해탈, 업보와 윤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언어는 어딘가에서 배운 듯하면서도, 체화된 무엇이 있었다. 나는 느꼈다. 이들도 진리를 일정 수준으로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허나 동시에, 진리를 통합하는 시야, 세계를 꿰뚫는 일관된 ‘언어’는 결여되어 있다.
선불교든,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이든—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의 진리에서 출발했다. 방향은 다르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내면의 상태, 혹은 존재의 진실은 같다. 마치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한 서로 다른 길일 뿐.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진리를 특정 교리에만 묶어두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종교에 나가는 것은 학교에 다니는 것과 같다. 진리에 대한 내적 감각이 아직 선명하지 않은 자들이, 훈련과 보호를 받기 위해 가는 곳. 독학이 불가능한 사람들, 내면의 나침반이 흐릿한 사람들. 그래서 종교는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수단이다.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다. 진리는 행위로써 입증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라 했지만 교회에 가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나는 이에 어느 정돈 동의한다. 신을 믿는다고 외치면서 삶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신론자보다 못하다. 반대로 종교적 의례는 하지 않지만 삶 자체가 신의 뜻에 부합하는 사람, 그는 이미 신 앞에 진실된 자다. 그가 곧 선지자다.
종교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향한 도구이자 언어이자 길일 뿐이다. 그것에 갇혀선 안 된다. 진리는 그보다 더 크다. 진리는 통합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진리를 더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