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인간 내면의 문제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신앙의 구조는 곧 정치경제의 구조다. 그것은 철학적 체계 이전에, 사회를 유지하고 구성하는 ‘배치’이기도 하다.
개신교를 보자.
현대의 개신교는 놀라우리만큼 자본주의적이다. 목사는 일종의 창업자다.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 설교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며, 청중을 고객처럼 유치한다. 더 많은 신도, 더 많은 헌금, 더 큰 예배당. 거대한 경쟁의 장 속에서 개신교의 교회들은 서로를 넘어서기 위해 세속적 마케팅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구조 속에서 목회자는 CEO이고, 신자는 소비자다. 성령의 은총보다는 카리스마와 유능함이, 말씀의 깊이보다는 감정적 울림이 승부를 가른다. 성공한 교회는 더 큰 자유를 누리지만, 그만큼 타락의 유혹 또한 깊어진다.
반대로 천주교는 사회주의적 체계를 닮았다.
성당은 교황청의 허가 없이는 지어지지 않으며, 신부는 자율적인 활동보다 ‘파견된 직무’를 수행하는 자다. 부유한 교구의 헌금은 가난한 교구로 재분배된다. 신부의 삶은 일정한 수입과 통제된 생활 안에 놓인다.
개인의 자율성은 줄어들지만, 대신 안정성과 일관성이 유지된다. 교회는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 움직이며, 각 성당은 전체 교회라는 몸체의 일부가 된다. 이 구조에서는 거대하게 타락한 개인보다, 서서히 경직된 시스템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나는 여기서 질문한다.
신앙은 자유로워야 하는가, 아니면 통제되어야 하는가?
신의 뜻은 개개인의 열정 속에서 드러나는가, 아니면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구현되는가?
개신교는 자유 속에서 분열되고, 천주교는 통일 속에서 경직된다.
하나는 너무 많은 가능성 속에 자신을 잃고, 다른 하나는 너무 정해진 규율 속에 살아 있는 숨결을 놓친다.
종교의 정치경제학은 단지 운영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신이 우리 삶에 어떻게 다가오는가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자본주의적 신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고, 사회주의적 신은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신의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윤리, 자율성과 구조, 창조성과 책임 사이에서 신앙은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신을 만날 것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종교가 다시 살아 숨 쉬기 위해 던져야 할 근본적 질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