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수업

by 신성규

우리는 종종 “시를 어떻게 쓰는가?“라고 묻는다. 글의 형식을, 구조를, 리듬을 기술적으로 배우려 한다. 그러나 진짜 운율은, 진짜 리듬은 기술이 아니다. 운율은 악보처럼 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리듬이 마음 안에서 먼저 울려야 한다. 그것은 학습이 아니라, 회복이다. 바로, 아이로 돌아가는 일이다.


아이들은 리듬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걷는 걸음마다, 말의 억양마다, 눈빛의 교감마다 이미 세계와 교감하는 진동을 지니고 있다. 그 진동은, 자라나면서 굳어지고, 규칙을 익히면서 희미해지고, 무언가를 “잘 하려는” 마음이 생기면서 사라진다.


문장은 걸음걸이다. 운율이란, 그 걸음이 가진 고유의 떨림이다. 배우려 할수록 우리는 중심을 잃고, 느끼려 할수록 그것은 돌아온다.


시는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다. 시는 감각의 기입이다. 운율은,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감정의 물결이 언어의 모양을 흉내낼 때 만들어진다. 그 사이 어딘가에, 아이의 마음이 숨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눈빛, 속삭임, 정적. 그 안의 음악을 듣는 것. 그게 바로 운율이다.


우리가 ‘잘 쓰기’ 위해 배운 모든 것들은, 어쩌면 다시 버려야 하는 법칙들일지도 모른다. 문장의 리듬은 문법보다 먼저 오며, 문법은 그것을 설명할 뿐 따라가지 못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형식은 내용을 이기고, 규칙은 본질을 덮어버린다. 우리는 생각하기보다는 정답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고, 느끼기보다는 기준에 맞는 감정을 소화한다.


이 과정은 이성의 힘을 극대화했지만, 동시에 존재의 전율은 희미해졌다. 우리는 문장을 쓰되, 울림 없는 문장을 쓰고, 우리는 노래를 듣되, 감동 없는 비트를 듣는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감각은 기능이 되고, 리듬은 기술이 된다.


‘리듬’은 단지 소리의 반복이 아니다. 리듬은 우리가 ‘세계와 조율되어 있다’는 증거다. 언어 이전에, 심장의 박동, 걸음의 속도, 숨의 길이는 이미 세계와 대화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 리듬을 생득적으로 느낀다. 아이에게 언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반응하는 몸짓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라며 그 몸짓을 분석하고, 분해하고, 재조립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동의 전체성이다. 사유 이전의 울림, 바로 존재의 리듬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시를 쓰려 할 때, 혹은 진정한 철학을 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리듬과 감각의 회복이다. 그것은 단지 ‘감성적’이라는 말을 초월한, 더 근원적인 체험이다.


존재가 세계에 반응하며 흔들리는 찰나. 그 순간에 쓰여지는 문장, 그 순간에 흘러나오는 소리, 그것은 우리의 사유보다 빠르며, 언어의 틀보다 깊다.


진정한 창조는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해내는 것이다.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감각, 세계와의 리듬 속에 살던 그 시간을. 그 감각이 복원될 때, 비로소 철학은 생기를 되찾고, 예술은 살아 움직이며, 사유는 더 이상 고립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안다. 운율은 문장의 기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었음을.


흔히 창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다. 문장 구성법, 기승전결, 서사 구조, 장르별 기법. 하지만 진짜 창작은 그런 표면을 따르지 않는다. 창작은, 어떤 순간엔 침묵이고, 어떤 순간엔 파열이다. 창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내는 것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창작 수업’을 받아야 할 만큼 자기 자신과 멀어졌을까? 언어는 태초부터 우리 안에 있었고, 이미지는 꿈을 통해 반복해서 나타났다. 리듬은 심장 속에 있었고, 표현은 말보다 먼저 몸짓이었다.


그러니 창작이란, ‘기술’ 이전의 감각이다. 그 감각은 타인의 기준으로는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통로로, 세계의 가장 깊은 층위와 접속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감각은 언제나 개인적이며, 어떤 수업도 그 본질을 가르칠 수 없다.


진짜 수업이란, ‘어떻게 쓰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내 안의 진실을 듣는가’를 묻는 것이다. 진짜 창작이란, ‘뭔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창작은 나에게 복원술이다. 산산이 흩어진 나의 감각을 모으고, 내 안의 리듬을 다시 느끼게 하며, 언어 이전의 침묵과 조우하게 한다. 또한 반항이다. 정형화된 말투, 제도화된 감정, 판매 가능한 감성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하여 창작은 결국 철학이다. 삶의 구조를 다시 묻고, 존재의 이유를 다시 쓰는 일.


진짜 창작 수업은 침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들리는, 작고 맑은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창작 수업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속독이라는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