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학을 공부했다.
그건 단지 서구의 이론을 익혔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내 의식의 구조를, 그 모든 ‘질문’의 방식과 ‘답’의 조건을 바꾸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겪었다.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곧, 세계를 ‘왜 그런가?’라고 묻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조직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입을 다물게 되었다.
나는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 “왜 저 사람의 말은 논리 없이 수용되는가”, “왜 문제제기는 곧 불경인가”라는 사유를 던질 때마다 낯선 존재가 되었다.
질문하는 존재는, 체계 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체계 밖에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서구 철학은 나에게 ‘합리적 의심’과 ‘비판적 주체’를 가르쳤다.
의심은 미덕이며, 비판은 참여고, 침묵은 동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들어간 조직은 반대였다.
침묵은 수용이었고, 질문은 도전이었으며, 비판은 불온한 공기를 만들었다.
동양적 조직은 ‘관계’를 기본 단위로 하고, 수직적 위계를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한다.
여기에서 “의문”은 체계에 균열을 주는 리스크고, “자기주장”은 화합을 깨는 자기중심성으로 간주된다.
결국 나는 질문을 접고, 말을 줄이고, 스스로를 사라지게 했다.
나는 안다. 이 시스템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합리적이지 않음을 바로잡는 언어가 오히려 ‘불편한 언어’가 된다.
결국, 철학은 내게 침묵하는 비판자가 되는 법을 가르쳤다.
나는 그 어떤 사원보다 더 체계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어떤 상사보다 침묵하고 말문이 막혀 있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철학은 오늘도 머릿속에 갇힌다.
사유는 점점 말라간다.
조직은 내 생각을 묻지 않고, 나는 점점 생각할 힘을 잃어간다.
철학을 배우는 이유는 단지 ‘생각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더 나은 말, 더 나은 판단, 더 나은 책임감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기반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형이 오히려 위계 속에서 부적응자가 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결국 생각하지 않는 자들만을 남긴다.
나는 어느 순간, 사람들이 말을 하되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말은 오갔지만, 이해는 일어나지 않았고
질문은 있었지만, 진지한 응답은 없었다.
그 자리에선 오직 승인, 합의, 위계만이 존재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언어가 다르다는 뜻이 아니었다.
하버마스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생활세계의 붕괴, 그리고 체계(system)의 침투였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세계를 두 층으로 나눈다.
생활세계: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고 의미를 주고받는 세계.
여기선 대화와 상호이해, 공감이 작동한다.
체계:
돈과 권력으로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구조.
여기선 목적 달성과 효율, 위계와 규율이 중요하다.
조직은 본질적으로 ‘체계’이다.
그러나 조직이 생활세계까지 침식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게 된다.
비판은 위험해지고, 말은 목적을 위해서만 쓰이며,
대화는 보고와 명령, 또는 방어와 침묵으로 축소된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성적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내가 말하는 내용이
사실로서 참인지,
규범적으로 정당한지,
내 진심에서 우러났는지,
이 세 가지를 상대가 신뢰할 수 있어야 대화가 된다.
그러나 내가 겪은 조직은
사실 여부보다 “윗사람의 말”이 우선이고,
정당성보다 “체면과 위계”가 앞서며,
진심을 말하면 “감정적이다”라며 배척당했다.
결국, 이해를 위한 말은 사라지고
승인을 위한 말만 남는다.
하버마스가 말한 ‘합리적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사람들은 조직에 들어가면 점점 말을 줄인다.
말을 줄인다는 건, 생각을 줄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은 사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이 검열되는 공간은 결국 사유의 사막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생활세계의 식민화’라고 불렀다.
즉, 조직의 규율과 효율, 목표달성이
개인의 세계와 자율성을 잠식할 때,
그곳은 더 이상 인간다운 공간이 아니다.
나는 다시 질문한다.
왜 나는 질문할 수 없었는가?
왜 말이 통하지 않았는가?
그건 단지 상대가 무지하거나, 감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구조 자체가 대화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을 해도 ‘의미’가 아닌 ‘권위’로 평가받는 공간에선
사람은 점점 말을 멈추고, 결국 자기를 지운다.
하버마스는 말한다.
우리는 인간으로 남기 위해
이해를 위한 대화의 장을 되찾아야 한다.
그 장을 찾는 것, 혹은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오늘날 철학을 배운 자가 해야 할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