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의 다른 작동

by 신성규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자주 막힌다.

그저 말이 막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내가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있으나 속하지 못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특히 여성들과 대화할 때, 혹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막힘은 더 자주, 더 빠르게 찾아온다.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레 대중적인 이야기로 향한다.

드라마, 예능, 일상 소소한 트렌드,

그것들은 어쩌면 ‘일반적인 인간 관계’를 위한 유연한 윤활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말할 만한 것이 되지 않는다.

감정의 반응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에 나를 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작가주의적 영화에 빠져든다.

가령 한 인물의 사유가 어떻게 파편화되고

시간의 구조가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따라간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런 건 왜 봐?”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이해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을 말하려 하면

대화는 낯설어지고, 분위기는 흐려진다.

이해보다는 당황이 되돌아온다.

결국 나는 말문을 닫고,

상대가 다시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가게 둔다.


그들은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편안해 보인다.

나는 그 흘러감 자체에 이질감을 느낀다.

나는 흐름보다는 깊이를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정보다 구조에 반응한다.


대중예술이 재미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그 예술이 작동하는 방식,

그것이 어떤 감정적 조건과 시장적 구조 안에서 만들어지는가에 더 끌린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내용’을 말할 때,

나는 그 드라마가 왜 지금 이 시대에 소비되는지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자주, 말이 막힌다.

나는 ‘생각’을 말하려 하는데,

대화는 ‘소비’를 나누고 있을 때.

그 간극 속에서, 나는 사람 사이에 있지만

사람 사이로 건너가지는 못하는 기분이 된다.


그러나 그 고립 속에서도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이 어긋남조차도 사유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다시 돌아온다.

말이 아닌 사유로 세상과 대화하기 위해.


허나 감정이 메마른 것은 아니다.

아니, 내 감수성은 과할 정도로 높다.

가끔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나 혼자 눈물을 적신다.

그 대상은 대개 동물이거나, 절망적 환경에 놓인 약자들이다.

그들은 나에게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로 다가온다.


그 진실은 과장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

말로 꾸며지지 않은 고통은, 오히려 더 직진하여 나의 마음을 꿰뚫는다.

대화 중엔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취약한 존재 앞에서는

나는 말을 잃는다.


그들이 울지 않아도 나는 운다.

그들의 눈빛, 처연한 몸짓, 구조조차 불가능한 환경은

나에게 세상이 감추려 하는 비가시적 진실을 던진다.

나는 그 앞에서 무력해지고, 동시에 너무나 인간적이 된다.


대중은 쉽게 감동하고,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그 감동이란 대개 서사의 클리셰 속에 길들여진 감정의 반사작용일 뿐이다.

나는 거기에 침묵한다.

오히려 세상이 외면한 존재들, 정치의 언어 바깥에 있는 이들 앞에서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지고, 조용히 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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