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더의 전복적 재해석

모성애는 무엇을 파괴하는가

by 신성규

봉준호의 영화 ’마더‘는 오랫동안 초월적 모성애의 비극으로 회자되어 왔다. 이 세계의 가장 깊고도 어두운 구석에서 아들을 위한 사랑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를 보여준 영화.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사랑이 무엇을 구원했는지보다 무엇을 파괴했는지에 주목하려 한다.


모성은 숭고하다. 그러나 그 숭고함은 종종 진실을 짓밟는다. 어머니는 범인을 보았지만, 외면했다. 그녀는 죽음을 덮었고, 침을 찔러 기억을 왜곡시켰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소거했다. 모성은 사랑이자 은폐였다. 정의 앞에서 침묵했고, 윤리 앞에서 울었다. 그녀의 오열은 슬픔이 아니라, 은폐의 소리였다.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는 종종 이와 같은 ‘침묵의 조율자’ 역할을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묻는다.

모성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우리는 모두를 죽일 수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는 흔히 고귀한 희생의 화신처럼 그려진다. 아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시대를 견뎌낸 사람. 그러나 그 구조 속에서 어머니는 끊임없이 타인의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 그녀는 정체성이 아니라 기능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역할로 작동하는 기계였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제 춤을 춰야 한다.


춤은 해방의 몸짓이다.

더 이상 죄책감에 짓눌리지 않고, 더 이상 타인을 위한 존재가 아닌, 자신의 몸을 위한 첫걸음. 그녀가 춤출 때, 세상은 그녀를 비로소 ‘개인’으로 맞이한다.

사랑이라는 무거운 짐, 구속의 이름표를 벗고서야 우리는 진짜 어머니를 만난다.

죄의 구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몸. 숨기지 않는 눈. 침묵하지 않는 입.


영화의 마지막, 어머니는 버스에서 춤을 춘다.

이 장면을 우리는 어머니의 광기로만 읽어선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선언이다.

그녀는 말없이, 그러나 온몸으로 외친다.

“나는 이제 나의 삶을 살겠다”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죄를 짊어지지 않겠다”고.

“이제 나는, 죄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겠다”고.


우리의 어머니들은 춤을 춰야 한다.

사랑을 벗고, 죄를 내려놓고,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로, 존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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