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비평의 품격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보며 감탄한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감탄하는지를 묻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멈칫한다.
이 감정은 어디서 왔는가? 장면의 미장센? 인물의 침묵?
아니면 단지 스토리라인이 취향에 맞았기 때문인가?
‘카예 뒤 시네마‘는 그 멈칫한 자리에 뛰어든다.
그리고 말한다. “영화는 철학이 될 수 있다.”
1951년, 프랑스의 작은 영화잡지가 시작된다.
그것은 단지 영화 정보를 전하는 잡지가 아니었다.
영화 그 자체를 언어로 삼고,
감각을 사유로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카예 뒤 시네마는 작가주의를 주장했다.
영화는 감독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하는 하나의 작품이며,
그의 사유와 감각, 역사와 철학이 투영된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비평의 기준을 바꾸었다.
이전까지는 ‘이야기가 재미있느냐, 지루하느냐’가 핵심이었다면,
카예는 물었다.
이 감독의 사유는 어디서 왔는가?
이 장면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하는가?
이 인물의 침묵은 어떤 철학적 지평을 열고 있는가?
카예의 비평가들,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에릭 로메르 등은 단지 영화를 논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썼다.
영화를 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 영화를 재창조했다.
그들에게 영화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현실을 의심하고, 세계를 해체하고, 존재를 질문하는 매체였다.
카메라의 시선은 곧 철학자의 시선이었고,
컷과 프레임은 사유의 경계였다.
현대의 많은 영화 비평은 여전히 ‘재미’에 머문다.
‘넷플릭스에서 뭐 볼까?’라는 질문은,
‘무엇을 사유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킬링타임 할까’로 변질된다.
하지만 예술의 진짜 힘은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질문하게 만들고, 잠 못 들게 만들며,
기억 속 어딘가에 오래 머무르게 만드는 것이다.
카예 뒤 시네마는 단지 비평지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의 가능성을 밀어붙이는 철학적 실험장이다.
무엇이 예술인가? 왜 이 장면은 나를 건드리는가?
이 세계는 왜 이런 방식으로 보여지는가?
예술은 질문을 던지고,
카예는 그 질문을 더 오래 머물게 만든다.
비평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다.
비평은 예술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