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로 보는 대중의 도덕갈망

by 신성규

요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야기가 아니라 판결문을 읽는 기분이 든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며,

누가 벌받아야 하고, 누가 응원받아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친절하게 주어진다.


『폭싹 속았수다』, 『더 글로리』, 『스카이 캐슬』.

이 세 작품은 서로 다른 시대, 공간, 계급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그들이 내는 정서는 한결같다.

선악이 분명하고, 갈등은 응징으로 해소된다.

주인공은 상처받고, 견디고, 결국은 이긴다.

악인은 처벌당하고, 조롱당하고, 제거된다.


대중은 환호한다.

속이 시원하다고, 복수가 통쾌하다고, 현실에서는 못하니까 드라마로나마 푼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통쾌함이 점점 불편해진다.

그 감정은 마치 도덕의 즉석식품 같다.

빠르게 만들어지고, 쉽게 삼켜지고, 금세 배부른 듯하지만

결국은 속이 허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악역이 인간이 아니라 기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두려움이나 결핍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역할’로 존재하고,

관객은 그를 미워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이 인물은 미워해도 돼.’

‘그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

이 얼마나 위험한 상상인가.

악은 사라져야 한다는 사고는, 곧 인간을 삭제하겠다는 상상과 같다.


좋은 이야기는

독자가 한 인물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그가 한 일은 분명 잘못되었지만,

그의 내면 어딘가에 어린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손끝을 망설이게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기억한다.

사람들이 울면서도 혼란스러워하고,

슬퍼하면서도 무언가 설명할 수 없던,

정리되지 않은 감정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


하지만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이야기들은

너무나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심지어 슬픔마저 예측 가능하고,

분노마저 연출된 통쾌함으로 끝나버린다.


그렇기에 나는 묻고 싶다.

왜 이야기가 꼭 ‘통쾌’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불편한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왜 누군가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비로소 정의가 완성되는가?


진짜 삶은 그렇지 않다.

삶은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존재들이 뒤엉켜 산다.

우리는 누구의 전적으로 선한 친구일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무심한 상처이기도 하다.


그러니 납작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얇아진다.

우리는 선한 주인공만 기억하고, 악한 인물은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렇게 지워진 얼굴들 속에,

사실은 우리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다.


나는 그런 그림자까지 비춰주는 이야기를 원한다.

내가 쉽게 응원할 수 없는 인물조차도 이해하게 되는 순간,

이야기는 더 이상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의 진실이 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통쾌함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말한다.


“이건 나일 수도 있었어.”

“그 사람을 쉽게 욕해서는 안 됐겠구나.”

“나는 정말, 얼마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그때야말로 이야기의 진심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만이

우리의 내면 어딘가를

조금이라도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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