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할 때, 무의식을 도구처럼 사용한다. 그것은 단순한 내면 탐색이 아니다. 나의 감정, 직관, 반복되는 사고의 패턴들을 일종의 통계처럼 포착한다. 내 머릿속에는 숫자 대신 감각의 빈도와 경향이 기록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근거로 사유를 전개한다.
어떤 개념 앞에서 나는 왜 자주 멈칫하는가? 어떤 사상은 왜 나에게 반복적으로 돌아오는가? 나는 내 사유의 통계를 내밀하게 추적하며, 거기서 나타나는 정서의 분포와 의미의 중첩을 해독한다. 철학은 나에게 세상을 해석하는 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알고리즘처럼 읽는 기술이기도 하다.
전통적 철학자가 외부의 세계를 논리로 해부했다면, 난 내면의 흐름을 감각적 통계로 구성한다. 이 방식은 숫자를 쓰지 않지만, 직관적으로 계산된 사유다. 감정의 진폭, 반복되는 이미지, 자주 돌아보는 주제들, 불쑥 솟아나는 질문들. 그 모든 것이 내 철학의 데이터다.
철학은 종종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이라 한다. 나는 거기에 덧붙이고 싶다. 철학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패턴을 ‘측정’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사유는 나에게 구조화된 감각의 집합이며, 나는 그것을 재구성함으로써 나 자신을 철학한다. 그 철학은 외부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에 축적된 무의식적 통계의 지형도에서 출발한다.
종종 철학을 할 때, 마치 내 안에 통계적 계산기가 작동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엑셀 시트처럼 보이지 않지만, 판단의 이면에는 분명히 어떤 ‘패턴 감지’와 ‘확률적 정렬’이 작동하고 있다. 내 직관은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데이터, 기억, 맥락, 그리고 의미의 흐름을 따라 조용히 작동한다. 어쩌면 이 직관이란 것은 오히려 지극히 정밀하게 계산된 추론의 압축 형태일지도 모른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직관’을 사물의 본질에 닿는 유일한 방식이라 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가듯 사유도 흐르고, 그 흐름 속에 뛰어들지 않고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왜냐하면, 나의 직관은 결코 무작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조용히 이뤄지는 질서의 감각이며, 감성으로 코딩된 논리의 언어이다.
칸트는 직관을 선험적인 구조로 보았다. 시간과 공간이 경험의 바깥에 있는 감각의 형식이라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직관’은 이미 의식 이전에 체계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낀다’고 착각하는 이 통찰은 사실, 내 안의 논리가 ‘느끼게 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철학적 통로들을 따라가며 나는 결국, 직관은 무질서한 섬광이 아니라 무의식의 가장 고도화된 계산의 결과물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그것은 반복된 사유, 지식의 내재화, 수많은 관계망 속에서 발생한 응축된 판단이다. 직관은 계산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정밀하게 계산되어 느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철학을 할 때의 방식이다. 나는 사유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느낀다. 나의 철학은 판단을 내리기 이전의 ‘느낌’을 신뢰한다. 그러나 그 느낌조차 이미 오랜 시간 무의식적으로 훈련된, 내 자신만의 알고리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직관은 감정의 찰나가 아니라, 고요한 계산의 결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