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이 마르크스를 논할 때, 그는 결코 마르크스를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대상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가 공포하는 사회주의의 유령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해부하지 않고, 그것의 사회적 환영을 공격한다.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다. 이해 없이도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인간, 바로 오늘날의 전사들이다.
피터슨은 지젝과의 토론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억압의 씨앗”, “집단주의의 전체주의”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가 비판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국가의 실패한 역사’이지, 마르크스의 이론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자본론》을 논하지 않았고, 노동가치론이나 잉여가치의 생산 구조, 혹은 역사 유물론의 내재적 논리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를 “개인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의 아버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상상된 적’일 뿐이다.
조던 피터슨은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않은 채 반대하는 입장을 신념화한 인물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마르크스를 ‘성스러운 이데올로기’로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마르크스를 실패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아직 유효한 분석의 도구로 제시한다.
그는 피터슨에게 말한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건 마르크스가 아니라 스탈린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주의를 ‘진리’라기보다는 문제 구조를 비틀어 보는 렌즈로 삼는다.
이는 곧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란 특정한 결론이 아니라, 끊임없는 비판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피터슨은 개인의 주체성과 자유를 중시하며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개인이 읽지 않은 사상을 감정적으로 단죄하고
자신의 청중에게 동일한 판단을 유도하는 강한 이데올로기적 서사를 구성한다.
그는 “집단주의는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그의 청중은 피터슨이라는 담론의 중심 아래, 완전한 집단주의적 동일화를 실행하고 있다.
피터슨은 집단주의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집단주의를 세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를 비판하지만, 그의 텍스트는 읽지 않는다.
대중은 유튜브 클립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짧은 인상비평과 강한 정서적 언어로 복잡한 사상을 ‘좋고 나쁜 것’으로 이분한다.
우리는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선언을 경쟁적으로 외치는 중이다.
조던 피터슨은 그런 시대정신의 결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