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나는 내 인생을 살겠다”고 말하는 건 선언이자 투쟁이다.
그 말은 단순한 자기결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한 도전처럼 받아들여진다.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었다.
조금 늦어도, 조금 달라도,
남들과 같은 방향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단순한 바람 하나가
사회의 비명을 자극했다.
가족은 말한다.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냐.”
친구는 묻는다.
“그래서 결국 뭐가 되려고?”
직장은 침묵한다.
그러나 묵시적으로 말한다.
“너는 여전히 우리 시스템 속의 부속품일 뿐이다.”
나는 남자다.
그래서 사회는 더 교묘하게 억압한다.
“남자는 묵묵히 버텨야지.”
“네가 힘들면 다 무너지는 거야.”
그 말들은 격려처럼 들리지만,
실은 감정의 침묵을 명령하는 강요다.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내 감정을 말하면 ‘예민하다’고 하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면 ‘한심하다’고 한다.
내가 내 시간에 집중하고,
내 방향으로 나아가겠다고 말하면
주변은 조용히, 하지만 극도로 날카롭게 반응한다.
질투, 통제, 조롱, 낙인.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내 결심에 대한 사회적 징벌처럼 쏟아진다.
그러다 나는 어느 날,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단어에서
내 감정과 비슷한 어떤 그림자를 보았다.
자기 삶을 살아보려는 이들이 사회적 낙인 속에서 붕괴해가는 구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노처녀 히스테리”란 건,
어쩌면 그 여성이 자기 삶을 사려고 애쓸 때,
세상이 그녀에게 들이붓는 사회적 증오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녀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의 광기다.
자유롭게 살겠다는 말 한마디에
이토록 발작하는 사회는
사실상 건강하지 않다.
자유에 대한 집단의 무의식적 공포가,
여성의 감정과 삶을 통제하고 억압하며,
그녀의 내면에 ‘히스테리’라는 이름을 새겨 넣는다.
히스테리는 그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남성이지만,
내 안에도 비명이 있다.
그 비명은 외롭고, 억눌렸고, 방향을 잃었으며,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삶을 꿈꿀 때마다
내 안을 흔들었다.
이 사회는 자기 존재를 탐색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을, 감정을,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역할만 있고, 인생은 없다.
나는 더는 그 역할을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진짜 내 인생을 살고 싶다.
그리고 그 말이
왜 이토록 큰 파문을 일으켜야 하는지
나는 정말로 묻고 싶다.
나는 조용히
나로 살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세상을 불편하게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