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머물고 있는 달빛과 가로등에 의지하며 도로를 지나가는 몇 안 되는 자동차들이 보인다.
길가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새벽을 마주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 되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옷을 두둑이 차려입고 집밖으로 나와 걷는다.
우리 집은 동네 이름이 시작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나의 목적지는 동네 이름이 끝나는 지점이 된다. 거창하게 한 바퀴를 도는 건 아니고 일자로 쭈욱 걷다가 도로 쭈욱 걸어 돌아오는 여정이다. 가끔 마음에 변덕이 들어서면 이 길, 저 길 돌고 돌아 집에 돌아오곤 한다. 그러면 대게 두 시간 가까이 걷게 된다.
걸음이 시작되면 하늘과 땅을 번갈아가며 시선을 둔다.
언제부턴가 쌀쌀해진 바람의 온도와 그에 걸맞은 퍼런 하늘 그리고 별 하나 반짝이는 모습이 딱 겨울이구나 싶다.
땅은 어떠한가. 나부끼는 낙엽들이 제 땅 어디를 돌아다니든 상관하지 않은 채 겨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참 의연하다. 그 세계를 걷고 있으면 늘 두고 있는 마음 씀씀이를 잊을 수 있어 참 좋다. 왜 잊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걸으면 그렇게 된다는 걸 걷고 난 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누군가라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는 건 언제나 기운을 내야 하고, 강한 사람이어야 하는, 본인은 힘들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 같다. 음... 나를 말하자면 말이다. (물론 누구도 내게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사람은 없다. 워낙에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다 보니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주는 올가미라고 보면 된다.)
누군가의 넋두리와 아픔을 들으면 사람인지라 해결해주고 싶고, 원하는 걸 다 해주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 그저 들어주기만 한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꽤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계속되니 어느새 지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내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하고 무거운 짐을 얹은 것처럼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나도... 가끔... 사는 게 힘든데...'
말하고 싶지만 그들은 내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가끔은
'그 정도 가지고 힘들다고 하면 어떡해!'
내지르고 싶지만 목구멍을 바로 막아버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날들이 지속되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으면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아프고, 힘든 얘기를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까?라는...
그러면서도 나는? 만약에 내게 고된 날들이 온다면?누구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말을 한다고 해도 편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알아버렸는데! 듣는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만약 그 이가 처음엔 호의의 마음으로 들어줬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에게 난 어떤 사람이 되어버릴지 알아버렸는데...]
새벽이 다하기 전부터, 새벽이 다하고 나서 까지 걷는다. 바람이 스치고 낙엽이 돌아다니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하여 이어폰은 필요치 않다. 땅을 밟고 땅의 차가움이 발목으로 올라오는 걸 느끼며 걷는다. 그러면 이런 생각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