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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Dec 26. 2020

나의 스위스 아저씨

스위스 베른에 사는 파킨슨 병 환자와 인생친구가 된 이야기

지난 9월, 스위스 베른에서 사는 레스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얼마 전 매입한 집을 꾸며야 하니 꼭 와달라는 부탁에 일주일 넘게 고민하다 시국이 이래서 못 간다고 땅을 치며 답신을 했. 지난주에 다시 연락이 왔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오라고. 이젠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아저씨! 천국 같은 베른에서 천사들과 두 달이나 지낼 수 있었던 황금 같은 기회를 코로나로 놓치고 말았습니다. 현재 변종 코로나와 브렉시트로 엉망이 된 영국을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차단 중이고, 차단이 풀려도 바이러스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기엔 리스크가 너무 큰 스위스 여행이에요. 


레스는 파킨슨병 투병 환자로 2017년 베른에서 알게 된 아저씨 친구예요. 부인이 프랑스로 한 달간 연수를 떠난 사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레스는 자원봉사 구인 사이트 Workaway에 광고를 냈고, 그 광고를 보고 베른에서 한 달간 지내보고 싶어 지원을 하고 베른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 취리히에서 워크 어웨이를 할 때 베른에 한번 갔다가 아기자기한 도시 풍경에 매료돼 꼭 다시 가고 싶던 동네였기에 후회가 없을  알았거든요.


아저씨와의 첫 만남

 

를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파킨슨병 환자를 처음 봤지만 만나기 전 특징을 검색) 밀려오는 연민에 잘 돌봐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인사를 하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데 자신은 자전거를 타고 왔으니 더러 혼자 트램을 타고 오라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니 파킨슨 환자가 자전거라뇨?


아저씨와 자전거와 하늘과 베른 풍경


아저씨는 병 때문에 온몸이 가끔 연체동물처럼 움직이고, 자세가 불안정하면서 걷는 게 불편할 뿐 자전거를 문제없이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요리 솜씨도 수준급이었어요. 전시회도 몇 번 열었던 예술가인 동시에 수많은 책을 낸 동화작가, 추리 소설가 그리고 왕년의 보사노바 재즈 색소폰 연주자인 스위스 아저씨.

아저씨의 추리소설. 아마존에서 판매중입니다.

본업으로 컴퓨터 관련 일을 재택근무하는 정말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 데다 와 공통분모(예술, 동화, 보사노바, 요리, 미식, 공감능력, 예민성 )가 많은 영혼의 친구임을 감지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간병에 돌입했지만 사실 아저씬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아니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집안 청소하는 분이 오셨고, 남에게 요리를 맡기지 않는 요리 천재 아저씨가 매끼 환상적인 식사를 직접 만들어 냈기에 가 할 일이라곤 부엌 보조와 정리(설거지는 식기세척기), 그리고 하루에 6번 약 챙겨드리기가 다였. 이것도 아저씨의 폰에 알람이 설정되어 있어 벨이 울릴 때마다 약이 담긴 통과 물을 떠다 주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라 감사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자원봉사를 했답니다. 중증 치매 할아버지를 돌보며 힘든 일을 많이 겪었던 스위스 바젤에서의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5천장 이상의 레코드판을 지탱하는 진열장도 아저씨 솜씨. 못만드는 게 없는 천재아저씨 였죠!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개인 DJ.


5천 장 이상의 싱글 레코드판을 소유한 음악광 아저씨의 퍼스널 디제이가 되는 것도 제 임무 중 하나였. 거동이 불편한 아저씨를 대신해 판을 골라 가지고 와 턴테이블 위에 올리고 음악이 끝나면 판을 도로 케이스에 넣어 진열장에 넣어두는 일이었는데, 한 면당 두 곡씩 수록되어있는 싱글 레코드의 특성상 7~8분에 한 번씩 돌리고 갈아줘야 해서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지만 선곡도 내가 하고 턴테이블 바늘도 내가 직접 올려 음악을 선보이는 디제잉을 스위스에서 해보다니 후훗! 재미있는 이력이 추가된 것 같아 신이 났어요. 음악 감상을 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지만 엄마 미소로 즐기는 아재 관객과 함께 흥을 타고 노래를 따라 불렀. 어설픈 디제이 코스프레를 하던 게 아저씨는 이렇게 옛날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며 신기해하곤 했어요. 열두 살 때부터 라디오 없이 못 살았고, 가요는 물론 , 재즈, 클래식, 제3세계 음악을 주로 방송하던 프로그램을 애청하며 특히 80년대 팝 음악의 매력에 흠뻑 빠진 지 오래라 20년이 넘는 아저씨와의 세대차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라디오 덕분이에요. 

오래전 아저씨가 아들들을 위해 손수 만드셨다는 스위스 국기 달린 나무 비행기.


그때 선곡했던 팝 중 한곡을 소개할게요. 영국의 혼성듀오 Eurythmics가 부르는 Sweet dreams 


Sweet dreams


Sweet dreams are made of these

달콤한 꿈들은 이것들로 만들어졌지


Who am I to disagree

내가 누구라고 반대할 수 있을까


Traveled the world and the seven seas

세계를 여행했고 7 대양을 건넜지


Everybody's looking for something

모두가 무언가를 찾고 있어


Some of them want to use you

그들 중 누군가는 널 이용하길 원하고


Some of them want to get used by you

그들 중 누군가는 너에게 이용되길 바라지


Some of them want to abuse you

그들 중 누군가는 널 남용하기 원하고


Some of them want to be abused

그들 중 누군가는 남용되길 원하지


좋아하는 EurythmicsSweet Dreams를 선곡하고 아저씨께 우문을 던진 적이 있었어요. 이 노래의 가사처럼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길 바라는지 장난처럼 여쭤보자 의외로 예스 하시며 자신은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이용될 것이고, 지금껏 그래 왔으며 자신의 인생에 그게 가장 큰 기쁨이라며 희생적인 가장의 면모를 드러내. 다정한 남편, 장성한 두 아들의 아버지인 아저씨는 아이들이 다 자라기도 전, 40대 젊은 나이에 갑자기 파킨슨 병에 걸려 십수 년을 불편하게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감을 손에서 놓지 않고 부지런히 가장 노릇하며 사랑 듬뿍 넣은 음식까지 매끼 준비하는 최고의 아버지 상이셨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성실한 사람중 한 분인 우리 아버지만큼 부지런한 분을 스위스에서 만나 놀라웠고, 그런 아저씨를 나는 마음깊히 존경해요. 인간으로서, 예술인으로 그리고 요리사로서.


아저씨의 홈메이드 채식 피자와 샐러드로 행복했던 점심시간. 아직도 잊히지 않는 혀에 감돌던 황홀한 맛..



음악인으로서의 아저씨도 존경스러워요. 그 불편한 몸으로 를 위해 색소폰을 연주한 아저씨의 보사노바 연주에 물개 박수를 치며 환호한 기억이 있습니다. 병을 앓기 전 아저씨는 음악인 친구들과 무대 위에서 재즈를 연주하던 색소폰 연주자였고 작은 콘서트도 종종 열었다고 하셨어요. 병을 앓기 전 사진 속 젊은 날의 아저씨 모습은 지금과 너무 달랐습니다. 눈빛은 자신감과 밝은 기로 충만했고, 얼굴 표정은 차분하며 우아했어요. 그 아름다운 청년을 무너뜨린 몹쓸 병 파킨슨...  






함께 만든 작품. 전 책갈피에 넣어 말린 꽃들을 총동원해 붙이고 물감을 떡칠했어요. 캔버스위에 아크릴 판화와 콜라주, 유리와 나뭇가지 그리고 금속으로 음악을 표현한 아저씨.
유리조각과 나뭇가지로 만든 아저씨의 걸작
통나무 한 통을 깎고 깎아 저 나무 고리 체인을 만드신 아저씨. 도대체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죠? 유리조각으로 만든 거북이 조명. 모두 아저씨 작품.
하루에 네다섯시간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자유시간엔 제 방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스위스에 있을 때 채색하던 수국 그림

개인 디제이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아저씨와 자전거를 타고 베른 시내를 투어 했어요. 트램이 지나다니는 길을 마주한 노천카페에서 차와 함께 크루아상을 즐기고,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골동품 중고가게에서 레코드 판을 고르고, 같이 요리를 하고, 함께 그림 그리고 작품을 만들던 나날들이 지나 드디어 아저씨의 부인 베아트리스가 연수를 마치고 프랑스에서 돌아왔습니다. 아주머니는 이탈리아어 선생이었는데 범위를 넓혀 불어 선생도 겸할 겸 한 달간 프랑스에서 공부를 한 것이었죠. 그런데 독어에, 이태리어, 불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녀는 영어를 못했고 가 불어를 잘하는 줄 알고 만 보면 불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 아저씨와 영어로 대화한 는 아줌마만 보면 불어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식은땀이 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왔어요. 프랑스에서 8개월이나 어학원을 다녔지만 낙제를 두 번이나 하고 돌머리 인증을 한 뒤 씁쓸히 프랑스를 떴던 부끄러운 과거로 의 불어 구사능력은 세 살배기 애 수준이었기에 아주 기초적인 단어와 어디서나 통하는 바디랭귀지로 춤을 추듯 생쑈를 하며 대화를 해야 했어요.


포기했던 불어를 본의 아니게 강제로 다시 하고, 불어를 모르는 아저씨에겐 영어로 말해야 했던(두 부부는 독어로 대화) 혼란의 두뇌 풀가동 사태를 무사히 마무리한 뒤 약속했던 봉사를 마칠 시간이 다가와 두 분의 환송을 받으며 스위스를 떠났습니다. 아저씨는 자신이 쓰고 그린 동화책을 선물로 주셨고, 아주머니는 맛있는 스위스 초콜릿을 손에 쥐어주셨어요. 감사한 마음에 아끼던 최고급 한국산 물감과 붓, 그리고  그림이 담긴 엽서 등을 아저씨 우정 선물로 드리고, 기차역까지 차로 데려다준 사랑스러운 아주머니께는 준비한 작은 액세서리를 드렸어요. 그 작은 선물에도 너무나 고마워하던 스위스 부부의 순수함을 간직한 채 이곳에서 봉사하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되뇌며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익숙한 영국에 다시 오니 처음엔 단체로 혀가 마비된 인간들의 맛없는 음식도 반가웠지만 점점 스위스의 모든 것이 그리워졌어요.


밝은 미소로 가득한 친절한 사람들, 인형의 집처럼 아기자기한 집들, 눈길 가는 마다 나무가 무성해서 초록이 싱그럽던 자연친화적인 도시, 구불구불 이어진 강과 그위에 세워진 높고 우아한 다리, 도심에 떡하니 자리 잡은 베른의 상징 붉은 곰 세 마리의 터전, 깨끗한 하늘 그리고 최고의 날씨, 포장디자인이 예쁜 병맥주와 맛있는 치즈 (베른에서 유학했다는 북한의 김정은이 살찐 이유 중 하나라고 조심스레 진단해봅니다).

Bern  뜻이 곰이랍니다. 곰을 사랑하는 분들은 베른으로 오세요! 수 많은 곰을 볼 수 있어요. 살아있는 곰부터 조각상, 우편함에 까지 곰이 판을 칩니다
안타깝게도 동기화 하지 않은 스마트폰 고장으로 천 장의 사진들이 모두 사라져 초여름의 스위스 사진은 없답니다. 작년 2월에 찍은 사진이라 모두 겨울 풍경이에요.
베른의 상징 붉은 곰들의 집과 따스한 그림으로 포장된 맥주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아끼고 사랑했던 아름다운 도시 베른에서 파킨슨 병 환자 간병하러 갔다가 역으로 보살핌을 받고 왔던 운 좋은 자원봉사자는 지금 그 천국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천사 아저씨가 요리해주시던 정통 홈메이드 스위스 음식도, 아이스크림 먹으며 자전거 타고 구경하던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의 베른도, 함께 작품 만들며 예술혼 불태우던 작업 시간도, 비전문적 디제잉하며 웃음 짓던 나날들도..


그 뒤로 매년 생일에 를 초대하는 아저씨지만 한 번도 가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그렇지만 작년 2월 취리히에서 한 달간 하우스 시팅 할 때 하루 일정으로 베른에 다녀와 드디어 2년 만에 레스의 가족들을 다시 만났답니다. 레스와 베아트리스의 마스터피스인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요정 같은 두 꽃미남 아들들도 오랜만에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고, 아저씨의 변함없는 요리 솜씨 혀가 절로 녹아내렸. 준비해 간 그림 프린트들을 선물로 드리자 리액션을 온몸으로 발산하던 순수한 베아트리스 아줌마. 오리지널 그림도 아닌데 그렇게 좋아하실 줄이야..


코로나가 종식되면 파킨슨병에 좋다는 홍삼을 한아름들고 스위스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 베른에 다시 방문하고 싶어요. 내 영혼의 친구 스위스 아저씨와 마스크 벗고 맥주 마실 날을 기다립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 선물로 드렸던 그림 프린트, 종이 위에 수채, 잉크. 2014~2018


집이 참 예쁜 베른. 하늘도 참 파랗습니다.


더 많은 그림 보러 오세요! 인스타그램 @nonichoiart


* 글을 쓰기 전 허락과 동의를 받으려 아저씨께 연락드리고 제가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고 하니 너무나 좋아하셨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그림이 맘에 드신다면 더 많은 그림 보러오세요!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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