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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Jan 04. 2021

스위스의 작은 동물원

자원봉사를 계기로 아홉 동물 돌보며 2년 연속 한 달씩 머물게 된 취리히

Workaway를 통해 바젤에서 첫 자원봉사를 마치고 두 번째로 머물게 된 크리스티안과 마야의 집은 취리히 도심에서 기차로 35분 걸리는 외곽에 있었습니다. 이름도 어려운 기차역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푸근한 인상의 크리스티안과 인사 후 걸어서 정확히 1분 걸리는 기차역 부근의 집에 도착한 순간 열대식물원에서나 풍겨 나올 법한 따스한 집안 온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마야 아주머니의 환대와 낯선 이를 보고도 주저 없이 다가오는 고양이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바젤에서 간병에 지친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치유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작은 동물원 같던 그 집

기니피그들이 밖의 별장으로 소풍 간 사이를 틈타 고양이들이 낮잠을 자며 점령해버린 기니피그우리
바구니안에 들어있는 것은? 정답 기니피그. 낮시간동안 밖의 별장에 소풍나가있는 기니피그들을 해가 질 무렵 데려오는 중이에요.

동물을 사랑하는 이 중년 커플의 반려동물은 무려 아홉 마리.

흑백 얼룩무늬 젖소 냥이 네 마리와 털이 너무 길어 대걸레같이 생긴 다섯 마리의 기니피그가 그들의 Fur-kids, 털-아기들이었습니다. 수많은 털-아가 동물들과 곳곳에서 싱그러운 녹음을 내뿜던 화초가 어우러진 집안은 마치 동물원을 연상케 했고, 벽마다 걸려있는 호랑이, 치타, 고릴라 사진과 소파 위 호피무늬 담요, 그리고 레오파드 쿠션은 제 눈앞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를 떠올리게 만들었죠. 이렇게 고양잇과 동물을 애호하는 수준이 아닌 거의 숭배하듯 떠받드는 독특한 스위스 커플과의 재미있는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비와 프리다. 네마리였던 고양이가 사고와 가출로 지금은 두마리만 남았어요.



감자를 넣어 만든 맛있는 스위스 음식을 브런치로 대접받고,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는 딸의 예쁜 방에 짐을 풀도록 도와주신 두 분은 친절하게도 교통 정액권까지 선물해주셨습니다. 어마어마한 물가의 스위스 답게 교통비 역시 미친 가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싼 정액권을 제 손에 쥐어주시다니 절로 마님 소리가 나올 뻔했죠. 쌀밥에 고깃국을 먹은 듯한 융숭한 대접에 성실한 돌쇠가 되어 일해드리겠나이다 다짐하고 수행하게 된 첫 임무는 냉장고 청소. 크리스티안 아저씨는 자전거 수리점에서, 마야 아줌마는 정원사로 일하고 있는데 일을 나가면서 제게 냉장고 청소와 천장 거미줄 제거를 부탁했습니다. 스위스 답게 치즈 냄새가 조금 풍길뿐인 작은 냉장고 안을 깨끗이 닦고, 긴 막대가 달린 브러시로 천장을 훑어내며 거미줄을 치워낸 뒤 고양이들과 놀다 보니 하루 해가 저물어 마야가 돌아왔습니다.


"Now I really trust you!" 


쇼핑한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으며 눈이 휘둥그레진 마야의 몇 번이나 계속된 "믿슙니다"에 저의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단지 밥값 하려 열심히 냉장고 청소한 것뿐인데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시니 그저 감사했습죠.


아버지가 늘 강조하신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 - 어떤 곳에 처하든 주인공이 되어 살라는 말을 명심한 덕분에 신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17년 4월에 자원봉사 인연으로 친구가 되어 그다음 해와 그다음 해에도 그들이 한 달간의 긴 여행을 떠난 사이 남겨진 동물들을 보살피러 매년 스위스에서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독채로 한 달씩.

바구니안에서 광합성을 즐기던 아이비냥.
몇년을 끌어도 끝내지 못하던 꽃코끼리 그림을 스위스로 가져가 배경에 연꽃을 그려 완성했어요. 종이위에 수채. 노니그림

지구 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동물 고양이들과 놀고, 귀여운 기니피그 돌보는 일 외의 시간엔 그림 그리고, 명상하고, 피아노 치고(피아노가 두대), 자전거 타고, 드라마 보고, 가끔은 취리히 도심이나 루체른, 베른으로 콧바람 쐬러 관광도 가며 개털인 나의 제정 상태로는 누리기 힘든 호사를 실컷 누렸죠.(취리히에서 베른 가는 버스는 기차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Flex Bus를 검색해보세요. 유럽 대륙 대부분을 이어주는 독일 버스회사입니다.) 고맙게도 휴가 가기 전 마야와 크리스티안은 생활비와 교통 정액권, 극장표를 남겨놓고 저를 위해 대량의 빵을 구워 냉동고에 꽉꽉 채워놓고는 모든 식재료를 마음껏 먹으라고 당부했기에 정말 만족스러운 스위스에서 한 달 살기였습니다.

부업으로 양봉을 하는 크리스티안과 마야덕에 귀하고 맛있는 스위스 꿀을 아침마다 홈메이드빵에 발라 먹었어요.
생긴것 처럼 맛도 좋았던 크리스티안이 구운 여러가지 모양의 빵.



한 달 동안 가족도 친구도 없이 지내보니 아무리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집순이도 밀려오는 고독을 감당하 벅찼지만 마음을 열면 고양이도 기니피그도 밤하늘의 별들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그곳 스위스의 작은 동물원입니다.


취리히 도심에 사는 마야의 아들이 본가 근처에 직장을 잡아 새벽일이 있는 날엔 자신이 쓰던 옛 방에서 자고 출근해 다행히 인간과도 잠시 접촉을 하긴 했어요. 마야의 아들 피터는 한국에서 교환학생 신분으로 잠시 머문 적이 있어 코리안 보드카 소주를 마실 줄 알고, 그 당시 최고 유행가였던 픽미업 노래와 춤도 알만큼 홍대 클럽 죽돌이 시절도 있었답니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서로에게 빠져들고 로맨스가 시작되었다는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쓰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소 닭 보듯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고, 공감능력 높고 자상한 남자를 선호하는 제 스타일이 아니라 (저도 차가운 피터의 스타일이 아니었겠죠?)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아, TMI를 보태면 제 스타일은 전편에 소개한 "나의 스위스 아저씨"의 첫째 아들 로리스예요. 엄마 아빠 닮아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하면서 스위트 한 효자에 스위스 맥주 포장 디자인에 그려진 요정같이 생겼거든요. 나이 차이 때문에 양심상 군침만 흘리고 말았지만요(무슨 늑대가 닭장 속 닭 노리듯..).

 

그럼 차가운 냉피터의 부모님은 차가운 인간들인가. 그건 또 아닙니다. 피터는 마야가 전남편과 낳은 자식이고, 크리스티안은 마야가 이혼 후 만나 사랑에 빠져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는 동거남이니 피터에게는 새아빠라고 할 수 있겠죠. 유럽에서는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기존 결혼제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동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이혼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 결혼보다 동거를 선호하는 유럽에서 동거 커플을 자주 볼 수 있는데요, 그들도 그런 합리적인 커플이었어요.


사연 많은 남자 크리스티안의 슬픈 사랑 이야기


아침저녁, 지극정성으로 고양이 아이비와 볼 키스를 나누는 애묘인에, 취미로 자작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낭만주의자 크리스티안. 자전거 수리점에서 일하고, 지금은 그만두셨지만 자전거 동호회의 회장이었으며 자전거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아저씨는 원래 자유롭게 살던 히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발길 닿는 곳으로 여행하던 젊은 시절,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떠난 아프리카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던 중 그만 트럭에 여자 친구의 자전거가 치여 사고가 나고 말았답니다. 바로 병원으로 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아저씨의 품에 끝내 눈을 감았다고 해요. 내 눈앞에서 연인이 죽다니..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현실에서 그것도 멀리 아프리카에서 그런 일을 당하신 아저씨는 얼마나 슬프고 힘들었을까요..

아저씨가 직접 찍어 보내주신 최근 스위스 사진

악몽 같았던 2년의 세월이 흘러 아저씨는 홀로 아이 둘을 키우는 마야를 만나고, 동물과 여행 좋아하는 자신과 취향 비슷한 여인의 집으로 마침내 이사를 들어오게 됩니다. 얼핏 보면 아줌마가 상처 입은 어린양 같던 아저씨를 구제한 듯 보이나 매끼 요리는 물론이며, 설거지, 제빵, 가드닝 등등의 온갖 집안일을 군말 않고 다 하는 아저씨를 보면 아줌마가 머슴을 들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저씨는 참 희생적인 남자예요. 다같이 거실에 모여 영화를 볼 때면 아저씨가 꼭 아줌마의 발을 열심히 주무르며 마사지하고 있었고, 숙면을 원하는 아저씨의 의견은 무시한 채 방 안에, 그것도 침대 옆에 기니피그 우리를 들여놔 종종 아저씨가 잠을 못 자 괴로워했죠. 채소만 먹고사는 기니피그지만 작은 몸에서 내뿜는 굉음 굉장히 시끄거든요. 얼마나 동물이 좋으면 같은 방 안에서 함께 자고, 또 얼마나 파트너를 아끼면 싫어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늘 함께 잘까요? 저는 그게 사랑의 힘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대걸레같은 기니피그들과 새로 들어온 털짧은 아가들. 4년전에 처음 만난 기니피그들 중 두마리는 노환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넜어요.


철인 3 종 경기에 나가도 될 정도의 체력을 소유한 마야


자전거로 다져진 탄탄한 허벅지 근육을 가진 그녀의 체력은 대단했습니다. 남자들도 부르기 힘들다는 색소폰을 취미로 매일 연주하고, 아저씨를 만난 뒤 자전거를 추앙하게 되면서 잘 타던 차를 팔아치운 채 어딜 가든 오로지 자전거로 이동하고, 조금 먼 거리는 기차와 자전거로 다니면서 보통 50대 중년 여성이 가지기 힘든 체력으로 정원사 일을 하는 아주머니는 아무리 봐도 저질체력의 저보다 열 배는 더 강해 보였죠. 두 분이 3박 4일 일정으로 자전거 여행을 다녀오고, 집순이인 저를 꼬셔 하루 온종일, 열세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소풍 다녀온 일화만 봐도 얼마나 강철 인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열세시간의 자전거 소풍. 가파른 언덕에서도 페달을 밟는 마야와 뒤를 따르는 한인 약골

열세시간의 소풍 아니 지옥 훈련 때, 스위스의 지리적 특성상 굴곡이 심한 가파른 언덕을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저는 자전거에서 내려 헉헉대며 걷고 있는데, 제 옆으로 페달을 여유롭게 밟으며 유유히 오르는 아주머니의 튼실한 하체를 보니 나도 저렇게 체력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됐죠. 잔병치레로 골골대던 약골이 현재 일 년 넘도록 유산소 전신 운동인 백팔배를 하루 삼십 분씩 매일 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자극 많이 받은 셈인가요.


강철 부부의 취미는 강물에서 수영하기


스위스의 4월은 아직 쌀쌀해서 겨울 코트를 입고 자전거를 탔던 저는 강가에서 두 분이 어느 순간 훌렁훌렁 옷을 벗으며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강에서 수영을 하는 모습에 심장이 떨려왔습니다. 강에 있던 백조들도 놀랐던 게 틀림없습니다.

갑자기 강에 들어온 아저씨를 경계하며 공격하던 백조와 저리가라며 소리지르고 물뿌리던 아저씨. 사진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백조가 성질내며 덤빌때 엄청 무서웠어요.

지난달(11월) 장난으로 '설마 이 추운 날씨에 강에서 수영하는 건 아니시죠? 건강하세요.' 하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왔습니다.

11월 중순에 강에서 수영하는 대단한 60대 스위스인...


강에서 수영하는 아저씨... 스위스의 11월이면 한겨울일 텐데 너무하시는 거 아녜요? 사진만 봐도 제가 심장마비 걸릴 것 같아요. 마야가 찍은 사진으로 보아 수영은 아저씨만 하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두 분. 순수하고 꾸밈없는 이 스위스 들이 부디 강에서 아무 일 없이 수영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작은 동물원에서 언젠가 또 만나요!


자작나무 패널위에 유화, 스위스이야기와 상관없는 그림이지만 수영하는 아저씨가 돌고래같아 넣어봤어요.
스위스의 크리스마스
동네 뒷편 언덕에 올라 바라본 알프스 산
Zurich
재작년에 교통사고로 고양이 별에 간 발리.. 제가 배 만지는 걸 너무나 좋아한 순하고 예쁜 고양이였는데 안타깝고 보고 싶어요.
그동안 하우스 시팅 하며 돌보았던 동물들을 그린 스케치 모음. 노니그림


*크리스티안의 동의를 얻고 글을 썼지만 사진 속 얼굴은 가렸습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스위스 사진을 보내주시는 아저씨덕분에 아직도 스위스에 있는 기분이에요.


♡더 많은 그림보러 놀러오세요♡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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