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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Jan 28. 2021

사슴고기, 와인, 소련 여자 그리고 할아버지와의 작별

조폭 똘마니였던 스위스 타투이스트의 치매 아버지 간병 이야기 2 편

스위스 바젤에 자리한 스티브의 집에서 치매 할아버지 간병을 하던 이른 봄, 생일이 돌아왔어요. 별생각 없이 오늘 내 생일이라고 얘기했더니 아침부터 다니는 저를 위해 케이크를 만들었고, 스티브는 생일이니 아주 특별한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기대하라고 큰소리를 쳤죠.


"생일이니 키스 한번 하게 해 줘!"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스티브에게 다가가 도울 일 있냐고 묻자 입을 삐죽 내밀며 다가와 그가 한 말이에요. 미쳤냐며 길길이 날뛰었어요. 그럼 볼에만 한다며 들이미는 징그러운 그의 얼굴을 가차 없이 밀어버리고 식탁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한테로 피신했어요. 퍼즐을 맞추고 계셨던 할아버지께는 세상 다정하게 굴어도 저런 망나니에겐 볼뽀뽀조차 허용 못해요. 볼 썩어 문드러질 일 있어요? 그래도 제 생일이라고 특별식을 준비하느라 부엌에서 분주하던 스티브에게 내심 고마운 마음은 들었어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잖아요.


드디어 기다리던 특별식이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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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를 곁들인 목이 길어 슬픈 짐승 사슴 고기가 저를 위한 생일 만찬이었어요. 머리가 띵했어요. 그 아름다운 눈망울의 신비롭고 영적인 동물을 먹는다는  상상도 못 해봤거든요. 웃기죠? 분명 녹용 달인 것을 한약 때문에 먹어봤을 텐데. 그리고 호주에서 또 다른 목이 길어 슬픈 짐승 캥거루도 쩝쩝거리며 좋다고 먹어놓고선 이게 웬 차별인지. 눈 딱 감고 먹어봐? 성의를 봐서 먹자 하다가 자꾸만 사슴의 영롱한 눈알이 아른거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부엌에 있던 스티브 모르게 옆자리의 다니에게 고기를 모두 넘겼어요. 다니는 채소를 입에도 대지 않는 정통 육식파 중국인이었으니 옳다구나! 좋다고 먹었죠. 만들어준 성의를 생각해서 사슴고기를 다니에게 줬다는 사실을 숨기고 채소만 먹으며 맛있다 고맙다를 연신 읊어댔어요.


연필로 밑그림한 사슴과 채색을 시작한 그림. 종이위에 수채. 2019. 노니 그림. 종이는 아르쉬 세목, 수채물감은 홀베인입니다.
아직 바탕을 칠하지 않은 미완성이지만 사슴이야기에 적합하기에 넣어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디자인으로 그렸어요.
공단위에 금분가루와 아교를 섞어 붓으로 그린 사슴.
녹용으로 먹어 미안해서  그린 사슴뿔 그림과 금분으로 그린 엉겅퀴, 데이지, 직접 만든 도자기 주전자와 미니 찻잔.



활로 하는 사슴사냥이 합법인 뉴욕 주


스티브는 사슴을 싫어해요. 사슴은 포도농사를 다 망쳐놓는 악마라고 표현하고, 아침에 포도잎 따먹으러 오는 사슴을 막으려 포도밭 둘레에 그물망도 튼튼하게 쳐놨어요. 간절히 사슴 한번 보고 싶었지만 자원봉사하던 한 달 동안 얼씬도 안 했던 걸 보면 사슴들도 스티브가 무서웠나 봐요. 그는 뉴욕에선 로 사슴을 사냥해 죽이는 것이 합법이라 십 대 시절(조폭 똘마니 노릇할 때) 활을 쏴서 명중시켜 사슴을 잡아본 적이 있다며 마치 빌헬름 텔이라도 된 듯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레 떠벌린 적이 있었어요. 아니 중세시대도 아니고 먹을게 널리고 널렸는데 그저 재미를 위해 사냥을 해서 들짐승을 잡아먹다니? 그런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에 너무 놀라 정말 사슴을 활 쏴서 죽였냐 어떻게 그 예쁜 동물을 잡아먹고 자랑하냐 했던 제게 사슴고기를 생일상으로 차려준 공감능력 없는 포식자 스티브. 그의 화살촉에 맞아 죽은 사슴도 안타깝지만 자신이 저지른 살생의 업보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스티브도 불쌍했어요. 모든 것은 돌아오마련이건만.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종이는 아르쉬 세목, 물감은 홀베인, 수채 색연필은 파버 카스텔입니다.  



개를 위해 갓 도축된 소의 내장을 구해온 남자


어느 일요일 아침, 스티브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며 좋은 곳에 가자고 제안했어요. 어딜 가냐고 물으니 도축장이래요. 거기에 가면 도축 후 필요 없는 소의 부위를 버리는데 내장을 공짜로 구해올 수 있어 냉동해놓으면 브랜디의 1년 치 먹이가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신이 나서 피 튀기며 생명 죽이는 장소에 같이 가자고 하다니.. 듣는 즉시 안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는 몇 번을 더 조르더니 결국 혼자 떠났고 한 시간 후 돌아왔어요. 역한 냄새와 함께.


스티브는 어디에서 산 건지 아무리 봐도 공업용 기계 같았던 커다란 고기 자르는 기계를 정원에 놓인 탁자 위에 세팅하더니 먹이가 될 내장도 함께 펼쳐놨어요.


"봐. 얼마나 신선한지. 아침에 갓 잡아서 냄새 아주 신선해. 저기 저 풀 보이지??"


소름이 돋고 눈이 커졌어요. 지진 난 동공으로 살펴보니 내장 곳곳에 초록색 풀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풀을 뜯어먹고 소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 송아지였어요. 그걸 보니 그 살육의 현장과 살고 싶어 발버둥 쳤을 소가 떠올라 괴로워졌고 어디서도 맡아본 적 없는 고약한 악취에 심한 두통마저 일어났어요. 그런 제게 그는 기계 출구에서 나올 잘라진 내장을 담을 작은 비닐봉지를 갖다 대라며 일을 부탁했고, 마지못해 한번 하다 구역질 나와서 못하겠다고 하자 옆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를 훈련시켜서 한 시간 가량이나 개의 먹이 마련했어요. 치매 걸린 할아버지께 그런 끔찍한 일을 시켜 죄송했지만 온 마당에 진동한 갓 죽은 시체의 내장 냄새를 맡으며 고기를 자르는 일은 정말 할 수 없었어요. 그저 제방에 앉아 불과 몇 시간 전 죽은 소를 위해 좋은 곳으로 가라고 기도할 뿐이었죠. 그 사건은 육식을 끊게 된 계기 중 하나였고 지금은 채식주의자가 된 것을 생애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떠난다는 협박에 눈치 보고 조금 정신 차리던 나르시시스트


다니가 떠나고 혼자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힘에 부쳐 체력이 말이 아니었던 제게 스티브의 독재 심보와 분노조절장애, 그리고 음담패설은 정신적 스트레스마저 주었고 갓 도축된 소의 내장을 보고 난 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떠나겠다고 선언했어요. 내가 치매 할아버지 간병에 사이코까지 돌보러 스위스에 온 건 아니었는데 왜 이런 에너지 뱀파이어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나 자괴감마저 들었어요. 그래서 취리히에 있는 다른 자원봉사를 알아보고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스티브가 한없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제발 가지 말라고 붙잡기 시작하는 거예요. 러시아에서 봉사자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할아버지를 위해 제발 있어달라며 부탁을 하는 그를 보니 마음이 약해져 차마 내칠 수가 없어서 알았다고 하고 결국 새 봉사자가 올 때까지 있어주기로 했죠.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할아버지를 위해서 남았어요.


그때부터 그는 할아버지에게 늘 하던 욕도 줄이고(1편에 자세한 욕설이 열거), 분노조절장애는 여전했지만 살짝 누그러졌으며 불쾌한 얘기나 음담패설도 제 눈치를 보며 멈췄어요. 역시 강약약강 부류는 강하게 대하고 협박해야 먹혀요. 강자 앞에서 약하고 약자 앞에서 강한 나르시시스트는 힘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보다 강하다고 여겨지면 꼬리를 내리죠. 아주 강력한 말투와 경멸에 가득 찬 차가운 눈빛으로 기선제압을 해야 해요 저런 인간은.



알고 보니 와인 장인 스티브 


저를 못 가게 하려고 스티브가 뇌물을 먹이기 시작했어요. 스위스 와인 어워드에서 금메달을 수상해 꼭꼭 숨겨두었던 자신의 소중한 와인을 제게 따라 주었거든요. 늘 리들(독일 체인 슈퍼마켓. 저렴하기로 유명)에서 산 싸구려 와인만 따서 마시던 인간이 웬일이래~? 술꾼 다니가 있을 때는 구경도 못해본 귀한 와인을 제가 떠난다는 말에 아낌없이 따서 주다니 조금 의외였어요. 거의 두병씩 매일 와인을 마시던 알코올 중독자 스티브가 친구의 양조장에 가서 열심히 빚은 포도주는 그의 뒤뜰 포도밭에서 정성스럽게 재배한 포도로 만들어져 와인 어워드에서 귀한 상을 타게 된 거였죠.


따사로운 여름 햇살에 달달하게 익은 보랏빛 포도가 사이코 장인의 손길을 거쳐 어두운 유리병 속에서 천천히 익어 은은하게 뿜어내던 그 스위스 와인의 향이란... 제 모자란 글솜씨로는 표현이 불가합니다. 마셔 본 와인 중 인생 최고의 와인이었어요. 쓴맛은 전혀 없고 입안에 착착 감기던 그 감칠맛은 천상의 맛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죠. 전 맥주파(한국에선 막걸리파)지만 이런 최고급 와인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유럽에서 20유로 이하의 저렴한 와인은 조심해야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살충제를 쓰는 포도밭에서 양조한 와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에요. 돌기 하나하나마저 예민한 감각으로 솟아있는 제 혓바닥은 MSG나 살충제 같은 화학성 물질을 어김없이 캐치하고 느껴요. 입안 가득 지는 그 불편하고 언짢은 물질의 비루함을 수용하기엔 내 몸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혀에서부터 신호가 옵니다. 그렇다고 예민한 혓바닥 때문에 늘상 비싼 와인만 마실 수는 없으니 항상 자제하다가 맛보게 된 최고급 공짜 와인은 저를 황홀한 포도의 요정으로 만들어 주었고 스티브의 죄를 조금 사해주었어요. 이 단순한 혀의 노예 같으니.


몇백 유로짜리 와인뿐만 아니라 제게 혼자 감상 하라며 팅겔리 미술관에 데려다주고 (할아버지는 타투 스튜디오에 모셔감) 티켓 살 돈까지 주며 열심히 뇌물을 바치던 스티브는 취리히에서 다시 꼭 돌아오라며 그때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도 사주겠다는 말까지 했어요. 저도 알아요. 저만한 자원봉사자가 없었다는 걸. 하지만 더 이상 피폐해지기 싫어 돌아갈 수 없었어요.


러시아 여자와 바통터치, 그리고...


드디어 그의 집을 떠나기 하루 전날 도착한 새로운 봉사자는 이미 반년 전에 이곳에서 한 달간 자원봉사를 했던 온 제 또래의 러시아 여자였어요. 이곳을 천국으로 묘사하고 스티브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하고 훌륭한 남자로 써놓은 과장된 그녀의 길고 긴 리뷰만 아니었어도 여기 오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괘씸했어요. 그 러시아 여자를 처음 본 순간 느껴지던 그 싸한 아우라와 탁한 눈빛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내일이면 이곳을 탈출한다는 해방감과 나부터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짐을 싸고 잠자리에 들려던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곡소리에 깜짝 놀라 귀를 기울여보니 스티브의 방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그랬어요. 둘은 갈 데까지 간 사이였고 이미 예전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거죠. 그래서 리뷰를 그렇게 사심 보태서 부풀려 써놨던 거였구나 소련 여자..


아버지뻘 남자와 뭘 하던 상관없지만 할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온 사람이라면 할아버지가 제대로 보살핌이나 받으실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고 다음날 예정대로 취리히로 떠 베른을 거쳐 3개월의 자원봉사를 마친 후 영국으로 다시 돌아어요.


결국 제 예감은 적중했어요. 러시아 여인과 바통터치 두 달 후 할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다니의 메시지를 받았거든요. 말도 안 돼... 할아버지 정말 정정하셨는데.. 나보다 힘도 백배 세고 튼튼하셔서 십 년은 거뜬히 더 사실 줄 알았던 건강한 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그렇게 돌아가셨을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어요. 의사였던 제니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치매환자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면 죽는 건 시간문제라며 그 러시아 여자가 분명 할아버질 방치하고 구박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의심했어요. 정말 그 여자 때문일까요? 모르겠어요. 무엇이 진실인지. 제가 곁에 잠시라도 더 머물렀다면 할아버지가 더 오래 사셨을까요? 그렇다면 너무 죄송해요 할아버지...


기분이 좋으실 때면 아이처럼 웃던 해맑은 모습의 할아버지가 기억나요.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내 손등에 뽀뽀하며 사랑한다고 천진난만하게 말하던 할아버지. 봉사자에게 단 한 번도 알라뷰라고 말한 적 없다며 놀라며 좋아하던 스티브.


좋았던 기억들만 간직할게요.

할아버지를 위해 요즘가끔 기도합니다.

영면하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랜파 에드워드 할아버지께 바치는 꽃들. 종이 위에 수채 2006~2020년. 노니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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