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마을 Falkland에서의 오래전 일상과 그림
18세기 스코틀랜드가 배경인 타임슬립 미드 '아웃랜더 Outlander'로 미국인들에게 유명해진 관광지 Falkland의 멋들어진 두 집에서 운 좋게도 넉 달 가까이 지낸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shinyartist/79
처음엔 하우스시터 구인 웹사이트로 연이 닿아 이탈리아로 휴가를 떠나는 샬롯 가족의 닥스훈트 두 마리를 2주간 돌보며 아름다운 파크랜드의 초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호사를 누렸고 두 번째 하우스 시팅은 그 동네에서 샬롯의 개들과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동네주민 조세핀과 존 부부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안녕하세요. 혹시 샬롯네 개들 돌봐주는 분인가요?"
"네 맞아요."
"반가워요. 저는 조세핀이에요. 이쪽은 남편 존이에요."
손바닥만큼 작은 동네라 내가 샬롯의 집에서 개들을 돌보며 2주간 지낸다는 걸 온 동네사람들이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스코틀랜드인 특유의 붙임성과 친화력으로 말을 건네온 조세핀은 눈매가 깊고 은발이 빛나는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니 조세핀이 기다렸다는 듯 하우스시팅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하우스시팅할 때 혹시 개만 돌보나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물고기도 돌봐요. 가끔은 기니피그도요."
나의 장난 어린 대답에 조세핀은 눈을 반짝이면서 근처 벤치에 걸터앉으며 덧붙였다.
"혹시 반려동물이 없어도 집을 봐줄 수 있나요? 저희 집엔 동물이 없는데.. 저희가 이번 겨울에 넉 달 동안 집을 비우고 여행을 가거든요."
그야말로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동물도 좋지만 혼자 있는 것도 즐기는 나로선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동물이 없으면 심심하긴 해도 그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좋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동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로 인한 임시집사로서의 책임도 없으니 한결 부담이 적다.
그렇게 긴긴 겨울 동안 집을 봐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조용히 그림 그리길 원했던 난 흔쾌히 수락했다. 조세핀은 여행을 떠나기 전 점심식사에 초대해 집안 전체를 구경시켜 주고 가전제품 사용하는 법, 알람시스템 해제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아마추어 화가인 조세핀은 내게 그녀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려도 좋다고 했지만 우풍때문에 썰렁함이 몹시 감도는 작업실은 추위에 약한 나를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아 아담하고 따뜻한 부엌에서 그림을 주로 그렸다.
전직 간호사였던 조세핀은 은퇴 후 그림과 사랑에 빠졌고 파크랜드에서 몇 번의 그룹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열 정도로 열정적인 화가가 되었다. 조세핀이 점심식사에 초대한 날에 자신의 그림 프린트와 카드를 내게 선물로 주기도 했는데 너무나 마음에 들어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림 한번 배워본 적 없고 평생 간호사로 살며 환자들을 돌보던 그녀의 예술세계는 대담하고 화려하며 우아했다. 꽃을 주로 그리고 풍경, 인물도 그리는 조세핀의 밝고 격식 없는 그림은 사랑스러웠다.
뉴질랜드와 호주에 정착한 자식들과 손자들을 만나러 긴 여행을 가는 노부부의 집에서 하우스시팅을 하게 된 그 겨울, 파크랜드에서 보낸 나날들은 평온하고 소박한 일상 속에 그림 그리길 원했던 내게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처럼 예기치 않은 행운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스코틀랜드의 시골정취가 물씬 풍기는 유서 깊은 마을 파크랜드는 발길 닿는 곳마다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올 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반시간을 걸어 유기농식료품점으로 가는 길은 낮은 언덕과 숲길로 이어져있었고 겨울꽃 스노우 드롭이 곳곳에 피어있어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하얀 꽃길에서 산책을 즐겼다. 1월부터 3월까지 겨울에만 피는 스노우드롭은 요정들이 빼꼼히 숨어있다 사람들이 사라지면 조심스레 나타나서 춤추기 시작하며 요정들만의 파티를 열 것처럼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저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 앙증맞은 꽃들이 가득히 피어난 길가는 마치 하얀 카펫을 깔아놓은 듯 진주빛으로 빛났고 찬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하면 꽃망울이 흔들리며 꽃가루가 눈처럼 흩날릴 것 같았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눈 덮인 흙속에서 묵묵히 버티다 결국엔 눈처럼 하얀 꽃을 피워내는 대견한 스노우드롭을 보며 거친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이 문득 주어졌다. 파뿌리보다 작은 하찮은 알뿌리 식물도 꽃 한번 피워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데 인간으로 태어나 아직 제대로 할 일을 해보지 않은 나를 돌아보니 절로 뉘우침이 왔다. 스노우드롭, 설강화라는 작은 꽃들이 내게 준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걷는 꽃길은 새로웠다.
우주적 척도에서 연결에 대한 인식과 욕구는 지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이해, 밤하늘에 대한 경외감, 기타 세련된 이해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수천 년 동안 별은 파괴불가능하고 영원한 존재로 여겨졌다. 기원전 2315년, 우나스를 위한 주문에서 죽은 파라오는 '불멸의 별'과 합류하라는 손짓을 받았다. 그로부터 2000년 후에 플라톤은 도덕적인 삶을 살았던 모든 인간이 지구에서의 짧고 덧없는 시간을 끝낸 후 향하게 될 최종목적지로 별을 선택했다.
그리고 창조주는 우주를 만든 후에 전체적인 혼합물을 별과 같은 수의 영혼으로 나누어 각각의 영혼에 별을 하나씩 할당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낸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별로 돌아가 살게 되어있다. - 엘런 라이트먼 <초월하는 뇌>
그러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연일 뉴스에서는 중국과 이웃한 한국에서의 끔찍한 상황을 보도했다. 파크랜드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 조세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당뇨를 앓고 있어 위험군에 속한 조세핀이 어쩔 수 없이 일정보다 앞당겨 귀국을 서두르게 되어 나는 생각보다 이른 퇴거를 해야만 했고 에딘버러로 급히 짐을 챙겨 돌아와 조세핀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다행히 바이러스 감염 없이 무사히 귀국한 조세핀 부부는 여독을 풀기도 전에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냈고 그 안엔 조세핀이 그린 예쁜 꽃그림 카드와 쿠킹호일로 꼼꼼하게 포장된 납작한 뭔가가 함께 들어있었다. 살며시 열어보니 돈이었다. 집을 봐줘서 고맙다는 그녀의 성의 표시였던 것이다.
원래 대부분의 하우스시팅은 돈을 주고받지 않고 집주인들이 여행지에서 사 온 선물을 주곤 한다. 종종 인심이 후한 집주인한테서는 선물은 물론 돈까지 받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아무 기대 않고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임한다. 나는 하우스시팅 마지막날 몇 시간씩 공을 들여 집청소를 말끔히 하고 내가 돌본 그 집의 반려동물 초상화를 그려주곤 했다. 그것이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 외국인인 내가 영국, 뉴질랜드, 호주, 스위스에서 하우스시팅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집주인들은 청결해진 집에 감탄했고, 그림 선물을 받고 기뻐했다. 나와 잘 지내던 반려동물들은 내가 떠나고 나서 한참을 방황했다는 뒷이야기도 종종 전해졌다. 온종일 나를 찾아 헤맨다거나 내가 머물던 방에서 나오지 않고 죽치고 있었다는.. 그럴 만도 했다. 지겨우리만큼 신나게 놀아주고 마사지해 주고 아픈 동물은 온 마음을 다해 돌봤기 때문이다. 하우스시터로 수많은 동물들과 어울리다 보니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고기도 끊고 현재 비건으로 사는 중이다.
자원봉사 겸 재능기부를 한 대가로 낯선 지역에서 숙소를 독채로 제공받으며 여행할 수 있는 하우스시터는 나 같은 집시화가 백수 노마드에게 최적의 Job이다. 처음 하우스시팅을 시작한 2012년엔 하우스시터가 흔치 않았고 완벽에 가까운 집청소에 반려동물 그림까지 그려주는 나 같은 호구가 인기폭발이라 일을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시터들의 수가 늘고 경쟁이 심해져 좋은 조건을 갖춘 집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한국에 돌아온 후 하우스시팅을 쉬고 있을 때도 영국에서 시터로 인연이 닿은 분들의 시팅 요청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으로 계속 들어와 나 아직 죽지 않았네 하며 웃었다. 해외에서 다시 하우스시팅으로 여행하고 그림 그리며 살게 될 날을 기다리며 제주에서 3년 반을 자가유배생활 하다 2026년 현재 호주 시드니에서 하우스시팅하며 머무는 중이다.
이제 여름이 지나 초가을의 문턱에 선 호주 블루마운틴에서 그 겨울, 스코틀랜드의 동화 같은 작은 마을 끝자락에 자리한 조세핀의 집에서 그림 그리고, 라디오 들으며 요리하고, 홍차 마시고, 스노우드롭 구경하며 산책하고, 유기농식품점 Pillars Of Hercules에서 산 초콜릿색깔의 찐득한 생강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고선 혼자 웃던 그 나날들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옛것을 좋아하는 아날로그 서양 노인들에게 인기 있는 24시간 뜨거운 하늘색 아거오븐에 시린 등을 지지고, 섬세한 꽃무늬가 수채화처럼 잔잔하게 그려진 도자기 찻잔과 접시들로 가득한 사랑스러운, 작지만 따스하던 부엌에서 머물던 나날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영국 시골의 낭만과 감성이 가득한 파크랜드에서의 추억이 밀려와 불현듯 그곳에 가고 싶어 졌다. 아웃랜더 여주인공처럼 타임슬립해 2020년 겨울의 스코틀랜드로 다시 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망상에 빠져드는 호주에서의 초가을 저녁이다.
행복의 느낌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경험처럼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가치판단에 달려있다. 즉 '대상'이 아니라 '과정'이 관건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는 동사(과정)밖에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 나이바우어 <하마터면 깨달을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