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로 이사 오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 가게 둘러보기였습니다. 칼슘 섭취를 위해 늘 쟁여두고 입에 달고 사는 케일을 찾아 헤맸지만 동네 가게에서 찾지 못해 지도 앱을 따라 멀리 떨어진 다른 식료품점을 찾아 먼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어요. 사는 곳에서 45분을 걸어야 하는 길이었지만 상큼하게 펼쳐진 귤밭 옆 한적한 시골길과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오래된 가옥들, 그리고 이국의 향기가 물씬 나는 야자나무를 길동무 삼아 걸어가니 무료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고 두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채 해변 마을을 살피고 있었답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면서 이방인임을 티 내며 걷다 어느 집 대문 앞에 나타난 삼색 고양이와 치즈 냥이를 보고 참을 수 없는 반가움에 호들갑 떨며 다가갔지만 (고양이에 미친 여자임) 둘 다 공사가 다망하신지 나를 본체만체하네요. 그때 집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 한 분이 나타나 고양이들을 가리키며
"얘는 양양이고, 노란 애는 봉석이(..봉식이었는지 봉두였는지 헷갈림) 예요."
하시며 애들 이름을 친절하게 알려주셨어요. 매일 집에서 밥을 챙겨주지만 밖에서 생활하는 길냥이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살뜰하게 챙겨주시는 모양이었어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양양이가 대문 밑으로 쏙 들어가 사라졌고 저는 그분께 작별인사를 한 뒤 케일을 찾아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슈퍼마켓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고 케일도 없었지만 저렴하게 깻잎 한 묶음을 사서 돌아오는 길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어요. 밀감색 노을이 짙게 깔린 저녁 하늘엔 초승달과 별, 그리고 야자나무의 검은 실루엣이 짙게 드리워져 집으로 가는 길은 마치 미술관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감상할 때처럼 두 눈과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어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
Reach for the Stars by Noni. Acrylic on canvas
그리고 그다음 날, 그 해변 마을의 매혹적인 자태를 잊지 못해 밝은 낮에 한번 더 감상해보려 그림을 그리다 말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바닷가 동네는 저녁에 보나 낮에 보나 그 자체로 신비로워 그림쟁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고, 밝은 대낮에 가보니 구석구석 더 잘 살펴볼 수 있어 좋았어요. 언젠가 이곳에 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상했어요. 스코틀랜드에서 강렬하게 느꼈던 데자뷔 현상도 일어났고, 전생에 여기에서 살았던 게 분명하다는 얼토당토않은 확신까지 생겼습니다.
전생의 난 어디에서 뭘 했을까? 망상의 나래를 펼치며 걷던 순간 감나무 아래 돌담 위에서 식빵을 굽고 있는 삼색 고양이와 맞닥뜨렸습니다. 어제 본 양양이었어요! 반가워 인사를 하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쓰다듬기 시작했습니다(고양이에 미친 여자의 천국 포인트). 어젠 새침 떨더니 신기하게도 오늘은 내가 만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두 눈을 완전히 감고 내 마성의 손길을 즐기던 삼색고양이. 머리, 귀 뒤쪽, 목, 등까지 안마를 해주자 뜨내기 안마사의 마사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지 그녀는 잠자코 앉아있었죠. 그때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다가왔어요.
"앗 고양이다!"
"나도 고양이 만질래~"
귀여운 꼬마들은 거침없이 양양이를 쓰다듬으며 즐거운 표정으로 재잘대고 한 명씩 번갈아가며 고양이를 만졌어요. 인해전술로 어느 순간 고양이로부터 나도 모르게 멀어져 버린 저는 '얼른 가라! 이것들아~ 이 고양이 내가 먼저 봤다.' 속으로 말하며 어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고양이를 다시 독점하기만을 기다렸어요.
양양이는 인내심이 대단했어요. 보통 시끄러운 녀석들이 아니었는데 그 자리를 계속 지켰고, 투박한 초딩들의 거친 손길도 견뎌냈죠. 관심종자 고양이가 분명했어요. 자신이 인간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걸 아는 듯했어요. 10분쯤 지나자 지루했는지 드디어 아이들이 떠났고 저는 핸드폰 카메라로 이 그림 같은 풍경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에 잘 익은 주황색 감 여러 개가 꼭대기에 앙증맞게 달려있는 예쁜 감나무와 구멍 숭숭 뚫린 검은 현무암 돌담 위에 느긋하게 앉아 인간들의 주목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앉아있는 아리따운 삼색 고양이 아가씨라니!
색상, 구도, 분위기 모든 것이 완벽한 삼박자를 이룬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흐뭇한 광경에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가 있는데 양양이가 몇 발자국 옮겨 앉더니 위쪽을 쳐다봅니다. 참새였어요. 열 마리도 넘는 참새 무리가 간식으로 잘 익은 감을 먹으러 날아온 것이었죠. 새를 잡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양양이의 변해버린 맹수 눈빛에 땀이 삐질 났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있는 티베트의 어느 절에 사는 고양이에 관한 책을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어요. 고양이가 쥐 나 새 같은 작은 동물을 잡기라도 하면 스님들이 고양이를 데려다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호통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작고 약한 생명을 해치는 건 나쁜 짓이라고. 본능을 제발 다스리라고. 다시는 살생의 업보를 쌓지 말라며 고양이를 엄하게 꾸짖는다는 대목에서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왠지 그 절에 사는 고양이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 무의식적으로 쥐를 잡긴 해도 스님들의 말귀를 다 알아듣고 뒤돌아서서 참회할 것만 같아요. 보통 인연이 아니니 절에서 스님들과 사는 거겠죠.
"양양아, 참새들 내버려 두자. 감 먹게 그냥 두자."
책에서 본건 있어가지고 고양이를 좋은 말로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양양이가 담 밑으로 뛰어내려 가더니 보이질 않았어요. 나무 아래로 떨어진 감을 먹는 참새를 공격하는 모양이었어요. 마음이 불편해 자리를 뜨려던 순간 양양이는 다시 담 위로 올라왔고 입가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새의 피나 깃털이 입 주변에 묻어있나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잘했어 냥아. 그 참새들을 내버려 둬서 착하다."
양양이는 제 말을 알아들었을까요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걸까요? 영물인 고양이는 왠지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습니다. 법환동 양양이. 작은 종이 위에 수채. 노니그림
집에 돌아오니 눈앞에서 모기가 웽웽대길래 손바닥으로 쳐서 납작하게 죽였어요. 본능적으로 살생을 저질러버렸군요. 죽이고 나서 아차 싶었습니다. 티베트의 스님들이 나를 보면 뭐라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