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풋하고 청초한 자태로 피어나기 시작한 여린 꽃들을 시샘하듯 날이 살짝 추워졌어요. 꽃샘추위에 떨고 있는 꽃들이 한겨울 길에서 나는 길고양이 걱정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염려가 되는 3월, 제가 현재 머무는 제주도는 겨울에도 웬만하면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기 때문에 늘 꽃을 볼 수 있는 축복받은 땅이에요. 꽃에 미친 그림쟁이가 정착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봄꽃은 튤립이에요. 모든 꽃이 다 사랑스럽지만 그중 딱 하나만 꼽으라면 봄꽃 중엔 튤립을, 여름꽃 중엔 라벤더를 고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읽은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엄지공주가 밤새도록 꿀잠 잔 신비로운 임시 침대 튤립에 빠져들어 색종이로 종이접기 할 땐 꼭 튤립을 접고, 그리기 쉽고 예쁜 모양의 튤립을 스케치북에 열심히 그려 넣기도 하고, 고등학교 졸업식 때 받은 튤립 모양 막대사탕을 자린고비의 굴비처럼 안 먹고 아끼고 아끼다 녹아서 흐물거릴 정도로 튤립이라면 사족을 못쓸 정도로 좋아했어요.
그토록 소망하던 네덜란드의 풍차 있는 튤립밭엔 가보지 못했지만 코로나 19가 세상을 덮치기 시작한 2020년 2월, 네덜란드로 난생처음 여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먹구름 가득한 잿빛 하늘에서 우울한 비가 내려도 사랑스럽던 암스테르담 캐널 위를 산책하고 튤립 박물관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철 이른 튤립들을 보며 풍차 튤립밭에 온 것처럼 신나 사진 찍고 들떴던 기억이 납니다. 짧은 일정이라 살짝 아쉬운 암스테르담 여행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뒤숭숭해지던 시기에 운 좋게 다녀온 마지막 유럽여행으로 언젠가 펜데믹이 끝나면 꼭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 1순위예요. 봄에 네덜란드에서 튤립꽃밭 보고 여름에 남프랑스에서 라벤더 밭 구경하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먹을 수 있는 꽃 튤립
처음 튤립이 네덜란드에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동그란 튤립 구근만 보고 양파의 일종이라 착각, 신나게 볶아먹고 구워 먹었다는 일화를 책에서 읽고는 그 예쁜 꽃의 알뿌리 맛은 어떨까 늘 궁금했어요.
'양파보단 맵지 않겠지만 왠지 질길 것 같은 식감이 느껴질 것 같아.'
진짜 먹어도 안전한지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놀랍게도 말리지 않은 튤립의 신선한 알뿌리는 달달하고 우유맛이 나서 꽤 괜찮은 맛에 꽃잎은 농약을 치지 않고 가꿨다면 식용이 가능하다고 해요. 슬프게도 세계 2차 대전 당시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말린 튤립 구근을 먹으며 긴긴 겨울을 연명했는데, 식료품 점에서는 대량의 튤립 구근을 식용으로 팔고 신문사는 튤립 요리 레시피를 넣은 신문을 발행해 사람들이 영양가 있고 비교적 요리하기 쉬운 튤립의 알뿌리를 먹을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1600년대의 Dutch Republic(현재의 네덜란드)에서 튤립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꽃 열 송이의 가격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세련된 타운하우스를 사고도 남는 돈이었어요.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튤립 열 송이의 가격은 $720,000(약 7억 원)으로 17세기의 보통 사람이 평생 벌어도 가지기 힘든 돈이었습니다. 얼마 안가 거품경제가 꺼지고 오늘날의 비싼 차, 시계처럼 럭셔리 품목이었던 튤립도 결국 시들고 마는 꽃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흥미를 잃기 시작하자 튤립 꽃 시장은 무너지고 튤립의 가치는 곤두박질쳐졌습니다.
작자미상의 튤립 수채화. 이 독특한 줄무늬의 튤립 열 송이가 집 한 채 가격이었다니 믿어지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