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마음

by 꽃마리

작년 가을 큰아이와 룩셈부르크에서 프랑스 랭스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앱으로 예약한 승차권에 적힌 버스 탑승 장소는 P+R Bouillon(부이용). 버스 탑승 장소까지 잘 찾아갈 수 있을지 한국에서부터 아슬아슬한 마음이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할 때 기차만 타다가 버스로 국경을 넘는다고 하니 설레기도 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교통이 무료이고, 우리에겐 시간이 충분했기에 전날 저녁을 먹고 버스 탑승 장소까지 시내버스로 답사를 다녀오기로 했다. 시내버스는 주차장 시설이 즐비한 도시 외곽의 종점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알고 보니 P+R은 주차(Parking) 후 대중교통으로 갈아타는(Ride) 곳을 일컫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차를 여기 주차해 두고, 무료 시내버스를 타고 집이나 직장에 가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 도심으로 차량이 많이 진입하지 않도록 도시 외곽에 무료 주차장을 마련해 둔 것이다. 무료 주차장에 무료 대중교통, 1인당 GDP 세계 1위 국가의 위용이란 과연 이런 것인가 싶었다. 고작 이틀을 둘러보았을 뿐인데 룩셈부르크는 태어나서 살고 싶은 곳이었다. 이곳에도 시기와 질투, 갈등과 배신이 있을까?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P+R 부이용에 버스를 세울 만한 공터가 있는 것은 확인했는데, 표지판이나 안내문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과연 이곳에 우리를 태우고 국경을 넘을 버스가 도착할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숙소 근처 정류장에 1분의 오차도 없이 도착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P+R 부이용으로 향했다. 휑하던 공터에 우리를 태울 연두색 이층 버스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약속은 꼭 지키는 성실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짐칸에 짐을 싣고, 버스 이층으로 올라가 우리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속속 도착해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9시 정각에 버스가 출발했다. 남쪽으로 달리던 버스는 룩셈부르크에서 출발한 지 30분 만에 프랑스 티옹빌(Thionville)에 도착했다. 버스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어느 한적한 도로 한쪽에 자리를 잡고 10분간 멈춰 서 있었다. 아무도 타지 않았고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룩셈부르크에서 탑승한 승객들을 그대로 싣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메스(Mets)에 도착했다. 한 명이 내리고 여러 명이 새로 탔다. 버스는 곧 다시 출발했다.


​이층 계단 입구 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과 이층 맨 앞 통창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은 우리처럼 모녀 사이 같았다. 큰아이 또래로 보이는 딸은 접이식 테이블 위에 낱말 퍼즐 책자를 펼쳐두고 몸을 바짝 엎드려 여러 색깔의 형광펜을 바꿔 가며 정성껏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러다가 통창 앞의 엄마를 부르며 큰 소리로 무슨 얘기를 하는데, 엄마를 무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엄마는 ‘또 저러나 보다.’며 조용하게 대꾸하고 마는데 나는 ‘퍼즐은 저렇게 정성껏 풀면서 엄마한테는 멋대로네.’ 하고 속으로 흉을 봤다.


그러다가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깨어 보니 버스가 어딘가에 멈춰 서 있었다.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기사와 승객들이 바람을 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소리치는 딸한테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엄마도 사람들 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도 잠시 버스에서 내렸다. 담배 연기를 피해 가며 공기를 쐬었다. 휴식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타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버스는 과속하지 않고 정속으로 묵묵히 달렸다. 나와 통로를 사이에 둔 자리에 엄마와 딸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딸이 이제는 엄마가 사랑스러운 듯 왼팔을 엄마 어깨에 두르고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의 딸을 흉보고 있던 나는 ‘그럼 그렇지. 엄마가 최고지.’ 하고 아까 잘못 봐서 미안하다고 속으로 사과했다. 사람들이 대체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기에 버스 안을 빙 둘러보니 안전벨트를 맨 승객은 한국 모녀뿐이었다.


랭스에 도착한 버스는 기차역 근처 도로 한쪽에 차를 세우고 사람들을 흩어 놓았다. 이틀 후 파리에 갈 때도 버스를 이용하기로 한 우리는 버스 탑승 장소를 단단히 눈에 담은 뒤 트램을 타고 랭스 시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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