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루틴

by 꽃마리

8시 30분경 책상 앞에 도착해 PC와 프린터를 켠다. 책상 위엔 전날 퇴근 무렵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해야 할 일을 급한 순서대로 적어 둔 이면지가 키보드 아래 깔려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옆에는 색색의 연필들이 나란히 누워 ‘오늘은 날 써 달라’고 조용히 외치고 있다. 하지만 내 눈길은 우선 찻잔에 가 닿는다. 높이가 낮은 꽃무늬 찻잔이다. 찻잔 안쪽의 흰 바탕에는 전날 마신 커피 찌꺼기가 눌어붙어 갈색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찻잔을 닦는 게 지금 바로 내가 할 일이다. 찻잔을 들고 탕비실로 향한다. 싱크대에서 문을 향해 등을 돌리고 찻잔을 씻고 있자면 한두 명이 들어와 커피를 뽑거나 내 뒤로 줄을 서는 소리가 들린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커피 뽑는 걸 기다려 주며 잠시 대화를 나눈다. 중요할 것 하나 없는,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침의 고요한 대화다.


오전 내내 커피는 나와 함께 머문다. 작업을 하는 동안 커피는 내 입에 아주 조금씩 흘러 들어간다. 커피는 금세 식어 차갑지만, 차가워도 괜찮다. 커피가 나와 오래도록 머무는 시간이 좋다. 오전에 작업이 잘되는 건 존재 자체로 안정을 주는 커피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과장해 보면 지금까지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별 탈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침의 커피 덕분이기도 하다. 첫 직장에서 나는 한때 새벽 다섯 시경에 출근했다. 미국 주식 시장이 종료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 여덟 시 전에 서비스하는 일을 담당할 때였다. 해가 뜨기 전에 출근해서, 먼저 출근해 PC를 쳐다보고 있는 팀장님께 인사를 하고 내 PC가 켜지는 동안 커피를 뽑으러 갔다. 사무실 한쪽에 커피를 뽑을 수 있는 조그마한 기계가 있었다. 준비해 둔 100원을 넣으면 다디단 새벽의 밀크커피가 종이컵에 제조되어 나왔다. 100원짜리 커피의 힘으로 새벽 작업을 무탈하게 마쳤다. 밤새 미국 주식 시장에서 일어난 일은 머나먼 한국의 아침 주식 시장에 즉각 영향을 주었다. 내 우주가 미국 주식 시장을 중심으로 돌았던 시기다.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는 지금의 나로서는 이게 그렇게 요란할 일인가 싶어 가끔 웃음이 나온다. 그 시기 기계가 만들어 준 밀크커피는 나의 아침 식사였다.


밀크커피 이야기에 또 한 장면이 떠오른다. 대학 시절 1학년 2학기부터 약 1년 반 동안 은평구에 있는 보육 시설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기숙사 친구의 소개로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꾸린 연합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하던 때였다. 토요일이면 신촌에서 뒤풀이 자리가 있었다. 가끔 취직한 선배들이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화장실 가는 척 나가서 근처 자판기를 찾아 밀크커피 한 잔을 뽑아 한 모금씩 마시며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술잔 옆에 커피잔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지켜 보고 있다가 언젠가 커피를 먼저 내밀기도 했는데, 나는 또 그게 부담스러워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어제는 세종으로 와서 10년째 다니는 대전의 대학병원 진료일이었다. 진료 두 시간 전에 채혈을 마치고 시간을 보내다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수치가 더 나빠졌다며,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의사는 내 수치가 나빠질 때마다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피해야 한다며 다툼이 있는 곳엔 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운동을 시작한 뒤로 사람들로부터 생기가 돈다는 말을 들어 검사 결과를 낙관하고 있었기에 조금 실망스러웠다. 수치가 나빠질 때마다 “그럼 커피는요?” 하고 내가 물어서인지, 의사는 묻지도 않았는데 “커피는 디카페인입니다.” 했다. 당분간 탕비실 출입은 금지다. 다시 출입할 그날까지 잘 버텨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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