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름 시내로 가는 트램을 타려고 정류장에 있는 발매기에서 표를 사려는데 결제 단계에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 봐도 같은 지점에서 멈췄다. 옆에 서 있던 남자 역시 표를 사려는 듯 내 행동을 지켜보는 것 같아 "저는 잘 안되네요."라고 말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가 내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행동은 "그럼 제가 한번 해 보죠."로 읽혔다. 그가 만약 결제까지 성공한다면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안되는 모양이었다. 자리를 바꿔 내가 다시 도전해 보았지만, 실패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번엔 또 그의 차례다. 우리는 어느새 한 팀이 되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화면을 눌러 보던 그가 발매기한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 시작하면서 팀은 곧바로 해체되고 말았다.
여러 명이 서 있는 쪽으로 캐리어를 밀고 가 그중 한 명에게 트램 안에서도 표를 살 수 있냐고 물으니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트램을 기다리다가 무심코 발매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아직도 발매기를 부여잡고 씨름 중이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발매기를 안고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며 사정하는 듯했다.
트램 안에 있는 발매기에서도 마냥 순탄한 건 아니었다. 카드 결제를 시도하는데 역시나 어려웠다. 흔들리는 트램 안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캐리어를 다리에 끼운 채 어정쩡하게 서서 사태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트램 안을 바라보았다. 각자 할 일을 할 뿐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 다시 힘을 내 발매기에 집중했다. 마법이었을까. 정류장 발매기에는 없던 동전 투입구가 그제야 보였다. 투입구가 사라져 버리기 전에 서둘러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표를 샀다.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빈자리에 앉았다. 매 순간이 도전이다. 사소한 시련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다. 트램 바깥 풍경을 구경할 새도 없었다. 비로소 빈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나 했는데 벌써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다. 왜 이리 바쁜가.
울름은 여행을 준비하다가 지도에서 처음 본 곳이다. 뮌헨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멈추지 않고 가자면 힘에 부칠 게 분명했다. 그때 울름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긴 지명들 사이에서 U, L, M 단 세 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이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강단이 느껴졌다. 버스도 잘 연결돼 있었다. 하루 쉬어 가기로 했다.
트램에서 내려 울름 대성당 쪽으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길 끝의 광장에 큰 장이 선 모양이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천막과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걷다가 우연히 시장을 발견했을 때만큼 신날 때가 없다. 과일과 채소, 정육과 치즈를 파는 상인들과 신중하게 물건을 고르고 값을 치르는 손님들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함께 나온 개들도 서로 인사를 나눴다. 높이 솟은 대성당 앞에서 일상의 평화가 순조롭게 작동하고 있었다. 나도 산딸기가 담긴 작은 종이갑을 집어 들고 계산했다. 상인이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신문지로 종이갑을 감싸 주었다. 그러자 신문지를 바로 풀어서 먹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대성당 안으로도 들어가 보았다. 첨탑이 약 162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둘러보고 초 하나를 밝혔다. 그러곤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거리 곳곳에 토요일의 활기가 담뿍 묻어났다. 나는 특별히 해야 할 일도, 가야 할 곳도 없었기에 걷고, 기웃거리고, 앉아서 쉬기를 반복했다. 울름에 도나우강이 지나고 있었다. 강변이 보이는 곳에서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리기에 가까이 가 보니 아름드리나무 아래에서 고령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어느 악단의 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시며 연주에 호응하고 있었다. 가까이에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는 '기울어진 집'이 있어 가 보았다. 중세 목조 건축물로, 세월이 지나면서 목재가 뒤틀려 집이 기울어진 것인데, 바로 세우기보다는 기울어진 채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숙소로 가는 길에 피자를 파는 바보(BaBo) 식당을 마주하고 한국인이라면 한 번씩 웃고 지나가겠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곳인지 사람이 많았다. 빵집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버스에서 배고플 때 먹을 곡물빵을 샀다. 반만 잘라 달라고 했어야 하는데, 얼떨결에 커다란 빵 한 덩어리를 다 사고 말았다.
다음 날 일찍 숙소를 나서 대성당이 있는 광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토요일의 활기가 가라앉은 자리에 일요일 아침의 차분한 고요가 들어서 있었다. 그때 닫힌 대성당에서 흘러나오는 오르간 소리가 일대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아침의 고요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보내다 트램 정류장으로 향했다. 내렸던 정류장 맞은편에서 트램을 타면 된다. 곧 올 거라고 생각했던 트램이 20분 뒤에나 온다고 전광판에 표시돼 있었다. 일요일에는 배차 간격이 넓어진다는 걸 간과하고 너무 촉박하게 트램을 타러 온 것이다. 20분 후에 도착하는 트램을 타면 버스 출발 시간 5분 전에 도착한다. 버스를 놓치게 될까 봐 마음이 바빠졌다. 트램 정류장 발매기는 또 '파업' 중이다. 어제와 같은 증상이다.
트램 정류장 한쪽 끝에 서너 명의 남자가 손에 캔을 들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소리만 크면 괜찮은데 말하는 방식이 가히 위협적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거칠게 웃고, 상대가 내는 소리 위에 자신의 소리를 마구 쌓았다. 여럿이 동시에 말하면서 소리는 더욱 커졌다. 나는 그들과 가장 먼 곳의 의자에 앉아 트램을 기다렸다. 트램이 30초라도 늦게 도착해서는 안 됐다. 일행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중간에 대화에 합류한 반바지 차림의 남자는 반대편 트램을 타고 사라졌다.
트램이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 오자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모였다. 시끄러운 사람들을 피해 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지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반가운 트램에 올라서자마자 발매기 앞으로 갔다. 한 번 경험한 것이라 잘될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두고 있던 동전을 넣고 표를 샀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트램 맨 끝에서부터 그들의 수다가 ASMR처럼 들려왔다.
사실 트램에서 내려 버스 타는 곳까지 가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도를 보면서 얼마간 걸어가야 하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5분뿐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캐리어 두 개를 든 젊은 남녀가 나와 같은 곳에서 내린다. 캐리어를 들고 여기서 내렸다는 것은 나처럼 버스를 타러 가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버스 타러 가냐고 물어보았다. 예상대로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남자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앞장서고, 여자와 내가 뒤를 따랐다. 여자가 내게 슈투트가르트에 가냐고 묻는다. 스트라스부르에 간다고 답했다. 내가 탈 버스가 슈투트가르트를 거쳐 스트라스부르에 간다는 걸 알고 있어 "같은 버스네요."라고 덧붙였다.
나란히 버스 타는 곳에 도착하자, 자그레브행 버스가 막바지 승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두 사람 덕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곤 자그레브로 가는 버스가 떠난 자리에 곧이어 나타난 버스에 짐과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