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20구 산책하기

by 꽃마리

앙제와 르망에서 파리로 돌아와 며칠 묵은 숙소는 파리 동쪽 끝에 있는 20구의 국제 레지던스였다. 그간 파리를 여행할 때는 비교적 시내 중심가의 숙소에 머물렀지만, 이번에는 아직 발을 디딘 적 없는 낯선 곳에서 묵고 싶어 이 숙소를 골랐다. 지하철 3호선 종점 갈리에니(Gallieni) 바로 앞인 포르트 드 바뇰레(Porte de Bagnolet)에서 내려, 지도 앱이 가리키는 대로 트램이 지나는 낯선 길을 따라 숙소를 찾아갔다.


레지던스는 규모가 컸다. 정원과 놀이터가 있고, 외부로 나가거나 늦은 저녁에 들어가려면 버튼을 눌러 마당의 커다란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게 배정된 맨 끝방까지 걸어갈 때면, 이 숙소가 기숙사 같다고 느껴졌다. 며칠이 아닌 몇 달을 지내다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넓은 습식 욕실에서 청바지를 발로 푹푹 밟아 가며 빨고, 윗부분만 열리는 커다란 창문 근처에서 빨래를 말렸다. 책상에 태블릿을 올려 두고 <은중과 상연>을 보거나 글을 쓰고, 아침에는 식당으로 내려가 사람들 틈에서 창문 밖 축구장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식사를 했다. 특별할 것 없는 그 시간들이 특별히 더 좋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도서관이 근처에 있어 오전 산책을 하면서 가 보았다. 그날 그 시간에는 도서관이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지도에서만 보던 도서관 앞에 직접 서서 서성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괜스레 유리문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읽어 보고, 길을 건너 맞은편으로 가 도서관 전체를 시야에 담았다.


도서관 근처에 스탕달 거리(Rue Stendhal)가 보여 또 한 번 반가운 마음이 이는 사이, 바로 옆에 교회가 있어 계단을 올라 들어가 보았다. 샤론의 생제르맹 교회(Église Saint-Germain de Charonne)라는 이름의 작은 교회였다. 아무도 없는 교회 안에 혼자 잠시 머물다 나왔다. 이 동네가 파리로 편입되기 전에 샤론이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교회 바로 옆에 묘지가 있었다. 샤론 마을 사람들의 묘지였다. 마을의 교회와 묘지가 가깝게 있으니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에서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면 교회에 들어가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슬픈 마음이 들었다면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파리는 도시 안에 크고 작은 묘지들이 모두 개방된 공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특히 매력적이다. 죽은 자보다는 산 자를 위해 그렇다.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고인과 잘 지냈던 지인이라면 꽃 한 송이 놓고 잠시 머물다 올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것이니 말이다. 신세 한탄이어도 좋고, 다짐이어도 좋고, 자랑이어도 좋다.


다음 날 오전에도 동네 산책을 나갔다. 전날보다는 좀 더 멀리 나가 보았다. 처음엔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1915~1963)의 이름이 붙은 작은 우체국을 발견했다. 계속 걸어가다 보니 그녀의 이름이 붙은 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 옆에는 그녀 이름의 작은 바(bar)가 있었다. 광장에는 원피스를 입은 채 다리를 살짝 어긋나게 벌리고 두 팔을 하늘로 뻗어 올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에디트 피아프의 동상이 있었다. 노래하는 모습인 것도, 아닌 것도 같았다. 그녀의 격정적인 삶과 예술을 표현한 것이 아닐지 짐작된다.


걷다가 모퉁이에 있는 작은 책방에 들어갔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이 많은 시기여서인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Indignez-vous)』가 눈에 띄는 자리에 진열돼 있었다. 우리나라 동네 책방에서 자주 보는 ‘비밀 책’ 코너도 있었다. 무슨 책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책방 주인이 포장해 놓은 책을 고르는 코너다. 한국에서는 혹시 읽은 책이나 가지고 있는 책을 고르게 될까 봐 구매를 시도하진 않는데, 파리의 책방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여 ‘대하소설’, ‘가족’, ‘1차 세계대전’이라는 키워드를 보고 한 권을 골랐다.


잠시 후 카페로 가서 야외 자리에 앉아 책 포장을 뜯어보았다. 클로드 미슐레(Claude Michelet)의 『Des grives aux loups』란 책이었다. ‘지빠귀에서 늑대까지’라는 제목이다.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은 책인 것 같다. 빽빽한 줄 간격과 일상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단순과거 시제 문장들을 보며, 아쉽지만 이 책을 읽는 날이 오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찰나, 옆자리 손님이 뿜어낸 담배 연기가 내 왼쪽 뺨을 거쳐 코로 훅 날아 들어왔다. 카페 야외 자리의 최대 변수는 담배다. 남은 커피를 훌훌 마시고 주섬주섬 책과 가방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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