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네프에서

by 꽃마리

퐁네프(Pont Neuf)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인데, 사실은 파리 센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센강에 놓인 최초의 석조 다리다. 퐁네프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글 때문이었다. 그는 팬들이 아는 어떤 온라인 공간에 가끔 음악 작업에 관한 생각을 풀어놓는다. 최근에 올라온 글에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어느 노래에 관한 생각이 담겨 있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보고 지어 팬들 사이에서 '퐁네프'로 통하는 노래였다. 나는 이 노래가 팬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노래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갖고 있지 않던 참이었다. 내겐 실체가 없는 노래나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글을 읽고, 그 노래가 내가 잘 알고 있는 여러 노래에 스며들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그 자체로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여러 노래에 영감을 주며 그간의 음악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 것만 같아 그 과정 자체가 더없이 매력적인 완성작처럼 느껴졌다.


서울에 와서 맨 처음 본 영화가 <퐁네프의 연인들>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중앙극장에서 봤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같은 학교에 다니는 고향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충무로로 가는 길에 호기심이 돋아나던 그 발걸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보수 공사를 위해 폐쇄된 다리 퐁네프에서 노숙하며 살아가는 곡예사 알렉스와 시력을 잃어가는 거리의 화가 미셸의 위태로운 관계를 다룬 영화다. 알렉스는 미셸이 시력을 되찾아 자신을 떠나게 될까 봐 두려운 나머지, 미셸의 가족이 미셸을 찾기 위해 낸 포스터에 불을 지르고 만다. 미셸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미셸이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는 옛 애인과 만나지 못하도록 극단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알렉스를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는 어렵다. 파괴적 사랑은 영화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미셸이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만난 알렉스에게 갖게 된 마음이 나는 우정 그 이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에 펼쳐진 불꽃놀이에 맞춰 알렉스와 미셸이 퐁네프를 무대 삼아 춤추던 장면을 찾아서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짙은 감색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색색의 불꽃이 화려하게 터지고 있고, 노란 스웨터를 입은 미셸이 다리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가 다리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면서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춘다. 알렉스가 곡예를 하듯 미셸을 따라가 함께 격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현재의 고통과 미래에 닥칠 시련에 대한 걱정을 잊고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라고 느꼈을 것이다.


작년, 갑자기 닥친 내 성향에 맞지 않는 업무 때문에 몸과 마음이 황폐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그간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일과 동료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마음을 달래느라 12월의 어느 날 파리로 떠났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퐁네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사람들이 모두 에펠탑이나 샹젤리제에 가 있는지, 지나가는 사람 한두 명을 제외하곤 나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저 멀리 에펠탑이 뿜어내는 빛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미셸과 알렉스가 일시 정지된 그들만의 세계에서 불꽃놀이에 맞춰 춤을 추던 바로 그 장소에서, 나를 압박해 오는 업무에 대한 시름을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나로 서 있었다.


알렉스와 미셸의 사랑은 불꽃놀이 속에서 춤을 추던 장면에서만 영원했다. 그래서 더 찬란하고 더 슬펐다. 아름다웠다. 언젠가 노래 ‘퐁네프’는 새로운 제목을 달고 완성작으로 다시 태어날 것 같다. 은근히 나는 그 노래가 세상에 몸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노래들에 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건 알렉스와 미셸의 불꽃놀이가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과도 같다, 바로 퐁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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