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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yking Aug 16. 2021

서른 살, 우울의 원인에 대한 고찰들(3) 워라밸

#3. 직장인 우울증_ 일과 삶 균형의 붕괴

#난이도 상, 일과 삶의 균형 잡기

워라밸(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은 오늘날 직장인들의 대화에서 자신의 직장생활에 대해 설명할 때 항상 등장하는 단어이다. 서른 즘의 우리 세대를 바라보는 우리네 부모세대의 기준에서 보면 요즘 애들은 참 자기 편한 것만 찾는다고 말씀을 하실 수도 있겠다. 내가 어릴 적ㅡ 부모님께서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하시던ㅡ만 해도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그리 유행하지 않았으니.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1970년대에 미국에서 처음 등장하였다고 하니 아마 부모님 세대에게는 왜 직장인들에게 이게 이렇게까지 직장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사항이 되었나 생소하실 만도 하다. 하지만 많은 부모님들께서 뒤늦게 지나간 당신의 삶을 두고 나 자신에 대한 마음 챙김의 시간이나 취미생활 하나 없이 일에다가 몽땅 쏟아바쳤다고 생각을 하시며 지나간 과거를 아쉬워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는 것을 보면 정말로 일과 삶의 균형은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현재로서는 청년세대를 포함하여 직업, 진로를 고민하는 사람들 중에 아마 워라밸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편한 삶을 추구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다. 바쁜 것을 그리 힘들어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틈틈이 아주 잘 놀러 다니고, 잔재주와 취미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서른 즈음에 겪는 우울의 원인에다 워라밸의 붕괴에 대해 적으리라고는 나 스스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모든 취업준비생들이 그렇듯,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분야 중 이왕이면 더 크고, 더 체계적이고, 네임밸류도 갖춘 기업에 지원을 하려 했다. 게다가 대부분 그런 곳들은 연봉도 높은 편이기 때문에 취업준비생 입장에서 보면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주변에서 그곳은 힘들기로 유명하다는 정보가 내 귀로 흘러들어오기도 하고, 매일같이 보는 인터넷 기사에는 그 좋다는 대기업을 퇴사하고 최근 유투버를 시작했다는 사람들의 소식들을 분명히 자주 접했지만, 먼저 경험한 그 사람들의 일화들이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나의 성공담에 집중하며 기업에 지원서를 낼 뿐이었다.

 직접 겪어본 직장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만만치 않았다. 학생 때는 점심시간이면 높은 빌딩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그리고 한쪽 손엔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다.)을 보면서 도대체 저 직장인들은 맨날 몰려다니면서 회사에 앉아서 무슨 업무를 하는 건지, 어떤 식으로 8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실제로 내가 겪어보니 직장생활이란 그들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늘 잔에 쓴 물이 찰랑찰랑 넘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 독은 밑 빠진 독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느꼈던 점은 기업은 절대로 사원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입사 초기에는 애사심에 불타올라 우리 회사가 얼마나 나를 위해 좋은 복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복지들은 우리 회사원들이 더 열심히 일을 잘할 수 있도록(그리고 다른 회사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어깨를 토닥이는 정책에 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는 철저히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고 결과적으로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가성비를 매우 좋아한다. 사원 한 명에게 한 사람이 혼자 정성을 들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해낼 수 있는 분량의 업무를 할당하는 법이 없다.  늘 어느 부서이던지 업무는 넘치게 주고 그러기에 일손은 늘 모자라고 업무가 버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계획보다 일찍 프로젝트를 완수했다는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기업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분들은 일개미 중에서도 아주 훌륭한 일개미들이다. (물론 부당하게도 예외도 종종 있다.) 나는 그런 분들을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며 사회초년생으로서의 패기와 열정을 바탕으로 2년간 정말 내 것처럼 열심히 회사에서 받은 업무에 매진했고, 실제로 목표한 바를 이루고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도 종종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이 손에 익을수록 점점 평안해지기를 기대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점점 더 새롭고 어려운 업무와 책임이 가중되기 시작했고 사람은 더 줄어들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느라 과열된 나의 스위치를 끄는 방법을 몰라서 날이 갈수록 점점 퇴근 후 시간에도 회사 업무에 손을 댔으며, 그러는 동안 나의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점점 바닥나기 시작했다.


 #한정된 에너지

회사일이 바쁠 때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조금 더 많이 생성해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은 쉽게 바뀌지가 않는다. 내가 업무로 더 바쁘면 바쁠수록 한정된 에너지 내에서 일에다가 할당하는 에너지 양이 많아진다. 그러면 자연스레 내 삶으로 들어가는 에너지를 줄이고 삶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하고 또 하고, 책임감 넘치고 전문성을 펼치는 열정적인 직장인으로서의 모습의 반대편에서 내 삶은 하나둘씩 망가지고 곪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직장에게 내어준 내 삶은 소중한 것이었으나, 내어주는 당시에는 일시적인 양보로 느껴서인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슬프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매일매일을 보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내 삶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번아웃 증후군과 무기력증이 상당히 심하게 와있었다. 주말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하며 놀아야 하는데 침대 밖으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겹게 느껴져서 그 소중한 삶의 시간들을 멍 때리며 무기력하게 흘려보냈다. 휴식을 갈구하다 보니 가족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는 것조차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혼자서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버거웠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누워서 넷플릭스로 영화를 감상하거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게 던져주는 짤막한 영상들을 헤집고 다니며 시청하는 정도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거울 앞에 선 그 삼십 대 여성은 얼굴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고, 자세는 매일 모니터를 본 사람이라는 게 유추 가능할 정도로 구부정하였으며, 화장을 예쁘게 하거나 예쁜 옷을 입거나 하는 등의 일은 귀찮았는지 대충 건너뛰고,  앉아서 일만 하는지 배는 잔뜩 나왔으며, 인상을 얼마나 쓰고 다녔으면 가만히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데도 그 얼굴에서 짜증과 피로가 가득 느껴졌으며 실제로 주기적으로 한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에너지의 총량에 대한 비교라는 재앙

이런 못난 모습을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내 옆자리 동료는 생기가 넘치고 인생을 즐길 줄 알아 보인다는 것이다. 영어 회화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아침에는 영어학원을 다녀오고 최근에는 퇴근 후 취미 삼아 프리다이빙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 바쁜 와중에 자신의 삶까지 풍요롭게 가꾸어가며 살고 있는 동료가 존경스럽게 보이는 동시에 나 자신이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게으른 인간으로 느껴져 가슴이 시렸다. 그저 사람마다 가진 에너지의 양은 다를 뿐인데 나는 그런 개념에 대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여 스스로를 책망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가슴이 답답하여 수많은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그 생기 넘치던 동료에게 직접 비결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문제아처럼 생각할수록 삶은 더 곪아갈 뿐이었다.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이것이 비단 남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타인과의 비교로 상처 받은 사람에게 흔히 들려주는 명언 중 ‘내가 비교 대상으로 삼는 대상은 오로지 과거의 나여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마저도 내 가슴을 후볐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더욱 발전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이미 지나온 ‘과거의 나’보다도 더욱 못난 삶을 사는 것만 같았고 이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이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는데, 과거의 나로부터 오히려 배울 점이 더 많았던 느낌. 과거의 내가 더 활기차고 영혼이 맑고 성숙했었더라는 느낌. 그리고 어떻게 그 모습을 되찾을지 통 모르겠는 막연한 느낌. 가끔은 20대의 나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너 어떻게 그렇게 희망찬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살 수 있었니?

아, 어떻게 해야 지금의 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퇴사의 타이밍

그때쯤 직장에서 비슷한 괴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는 서른 즈음의 또래들과 맥주 한잔 기울이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모두가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사직서를 당장에 제출할 실행력은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마지막에 하게 되는 고민은 ‘과연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가 맞는 걸까?’였다. 다들 지금 하는 업무가 죽도록 싫지는 않고, 그렇다고 딱히 달리 다른 꿈이 없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서른 초반 늦었다면 늦을 수 있는 나이지만 지금이라도 꿈을 위해 훌쩍 유학을 떠나볼까 하는 마음은 있지만 ‘무엇’을 할 것인지가 없다고.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남의 회사에서 이렇게 심신이 갈려나갈 바에야 내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무엇을’ 아이템으로 해서 내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그 아이디어가 없다고. 우리는 모두 말했다. 요즘 유튜브가 그렇게 핫하다던데, 유투버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무엇’에 대해 유튜브를 찍을지가 또 막막하다고.

“그것만 있다면 내가 당장에라도 사표 낸다!” 모두가 그렇게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Plan B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겐 멋들어진 차선책이 아직 없다. 차선책이 생기는 것이 퇴사의 타이밍이 되려나.

 퇴사의 타이밍에 대해 문뜩 궁금해져서 나는 또 관련한 책들과 콘텐츠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많은 퇴사 선배(?)들이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가장 맞는 말이었다고 생각이 드는 말이 있다.

“퇴사의 타이밍이 오면 딱 알게 됩니다. 온몸의 세포가 그곳을 거부하는 느낌이에요. 내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망설여지는 느낌이 아닙니다.”

밤마다 누워서 퇴사에 대해 고민하고, 이 일이 나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를 어언 수개월.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해서 연차를 내고 쉬고 싶었지만 지금 하는 일이 마무리되려면 오늘은 쉬면 안 되어서 아픈 것을 꾹 참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런 나날이 계속 이어졌다. 몸이 아프고 시간에 쫓기니 남편에게도 자꾸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본디 짜증이 많은 성격이 아닌데, 이렇게 변해가는 내 자신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일이 너무 바빠서 집에서 재택근무로 자정까지 야근을 하고,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노트북을 켜서 오전에 재택을 이어나간 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출근길에 오를 계획을 세웠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얼른 노트북을 챙겨 나오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순간, 갑자기 너무 가기 싫은 마음에 온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쏫아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비어있는 집 한가운데 혼자 우뚝 서서 팔뚝으로 눈물을 닦았다. 유치원에 가기 싫어 엄마에게 떼를 쓰며 울던 그 어린 시절이랑 아주 닮아있었다. 이런 생떼는 2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수험생활과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인내하며 보내면서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어린애처럼 변해버린 나 자신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날도 나는 그런 내가 진정한 것 같자, 나를 무시했다. ‘나’는 ‘나’에게 수많은 구조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나는 번번이 무시했다. 그러자 그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한두 달여 뒤, 여느 때처럼 노트북을 켜고 집중하여 업무를 하는데 수없이 쏟아지는 메일과 메신저 알람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며 눈물이 주르륵 났다. 여기서 숨이 막힌다는 것은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숨이 턱 막히는 증상을 말한다. 그리고 그 주 금요일 상사와의 면담에서 나는 퇴사를 하겠다고 알렸다.  

 내가 그동안 익숙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잘하던 것이자 삶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중을 위해 현재의 괴로움을 참고 버티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버티는 것은 미련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이고, 내가 중심으로 여겨야 할 것은 ‘나’인데, 더 이상 나의 소중한 ‘지금 이 순간’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우울과 퇴사의 관계

내가 접했던 책과 영상들에서 많은 전문가들은 내담자를 향해 ‘우울할 때 중요한 결정을 하지 말라’ 고 말을 했다. 그런 결정은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나면 후회를 불러오게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우울증 환자에게는 회사를 다니는 것이 일에 집중할 시간을 내어주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장마저 나가지 않게 되면 정말 방에 틀어박혀 우울 속에 더욱 빠져들게 된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이 말을 보고 나서 많이 망설여졌다. ‘내가 이렇게 정성을 들여 입사하고, 적응해온 회사인데, 혹시 내가 지금의 우울로 인해 충동적으로 퇴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그래서 혹시 지금 이 글에 공감하고 있고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점을 반드시 고민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우울해져서 회사일이 힘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회사로 인해 나의 우울이 생겼는지. 그리고 신중하게 나를 위한 결정을 내리시기를 응원한다.

나의 경우 결과적으로 직장을 그만두었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서면서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있는 중이다.


<힐링 추천> 노동의 의미에 대한 나만의 정답 찾기.

괴로워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결국 근본적인 이유를 파헤치려 하기 시작했다. ‘노동’이 나에게서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노동은 내 개인의 꿈과 직결되어야만 내가 심혈을 기울이고 시간을 쏟는 것이 괴롭지 않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노동이란 그저 나에게 안정적으로 급여를 제공하여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노동이 괴롭다면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나는 분명히 이 일이 하고 싶어서 이 분야에 취업을 한 것인데 이 일이 괴롭다는 것은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이 일이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면 나는 이것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인내하고 유지해야 하는가?

노동은 한 개인이 끝없는 우울을 헤맬 때 건전한 방식으로 집중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약일까? 아니면 삶에서 생각할 시간을 빼앗고 자유를 억압하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어 끝내 나의 심신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독일까?

내가 이렇게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괴롭다는 이유로 그만두게 되면 그것은 그저 도망치는 나약한 모습일 뿐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괴로움은 모두 합당하니 그저 내 영혼이 더욱 성숙해지고 나 스스로가 더욱 요령을 터득할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이 상황을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나의 경우에는 위의 질문들에 대한 모든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이전 직장 생활에서 분명히 느꼈던 것은 바로 ‘이 일을 계속 이어나간다고 가정했을 때, 일과 삶의 균형에서 일에 에너지를 할당하느라 무너져버린 내 삶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분명 이 일은 내가 처음 선택했을 당시의 이유와 같이 멋지고 가슴 떨리는 명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누릴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일을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내 삶을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지, 이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어찌 됐건 우리는 계속해서 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현 직장에서 덜컥 퇴사를 하게 된다고 해도 다른 직장을 다시 가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내 삶에서 노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분명해져야 스스로 더 만족스러울만한 직업을 선택할 힘을 가지게 될 것이고,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안정적으로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정답을 찾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고민을 하는 것은 분명히 도움을 줄 것이다. 혼자서 하기 어려울 때는 철학자 니체와 관련된 서적 중 노동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는 부분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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