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hinyking
Aug 12. 2021
서른 살, 우울의 원인에 대한 고찰들(2) 꿈의 부재
#2. 가슴 떨리는 꿈의 부재
#꿈.
한 글자만으로도 충분히 동기 부여가 되고 힘이 셈 솟는 마법의 한 글자. 그 어떤 보상이 당장에 없을지라도 꿈을 향한 투자는 하나도 아깝지가 않다.
어렸을 적에는 누구나 꿈을 쉽게 가졌고, 뭐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일 년에 한 번씩 바뀌기도 했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이 단어는 너무나도 서글픈 단어가 되어버렸다. 서른 즈음에 찾아오는 인생에 대한 우울의 원인은 동기의 부재, 목표 상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혼란. 즉, 꿈의 부재이다.
#거짓 자아의 꿈.
우리는 모두 꿈을 가지기 힘든 교육을 받아왔다. 외국에 나가서 살면 조금 달랐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만큼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은 ‘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힘들기로 유명하다. 온갖 주입식 교육과 정해진 정답 찾기에만 몰두하며 순위 경쟁에 너무나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교육 속에서 획일적인 꿈ㅡ일반적으로 점수가 높은 과에 해당하는 꿈을 지망하게 만드는 방식ㅡ을 가진다. 목표로 하는 직업이 뚜렷하게 있는 친구들도 몇몇 보았지만 이것도 거짓 자아가 써 내려간 꿈일 확률이 높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듯이 말이다. 거짓 자아라 함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듣고 가진 꿈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내 안에 자리 잡은 척하는 목소리로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끔 되어버린’ 자아이다. 그리고 그 외부의 힘은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확률이 높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보다 ‘이루지 못한 삶’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의 경우, 당신이 자라던 그 시절 아주 우수한 여성이었고, 4년제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시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좋은 직장에 들어가셨었다. 하지만 그 당시 많은 여성이 그러했듯 결혼 후 아이 셋을 낳고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사셨다. 나는 엄마로부터 ‘여자는 계속 일하려면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 ‘아이 낳고 나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던 것 같고 아마 그것이 내가 수많은 전문직 중에 약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게끔 만든 것 같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장래희망은 ‘약사’라는 직업으로 생활기록부에 늘 적혀있었다. 나의 가슴속에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꿈은 뒤로 한채, 머리로 계산해서 낳은 꿈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우리네 어머니들이 직장여성으로서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하셨고, 그러느라 어쩔 수 없이 출산, 육아에 대한 아쉬움을 잔뜩 가진 삶을 사셨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들에게 ‘좋은 전업주부가 되어 가족을 충분히 돌볼 수 있는 삶을 고려해보라며 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셨을까. 그랬더라면 오늘날 내 또래들은 ‘좋은 엄마’, ‘완벽한 전업주부’가 되기 위해 힘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머니들께서는 학업, 직장에 대한 아쉬움을 잔뜩 가지신 채로 내 딸만큼은 그런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시며 학업을 응원해주시는 듯하다. 이런 사실들이 아버지들의 마음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와닿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누구의 꿈인지도 명확지 않은 꿈을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꿈이 아니라 ‘직업’이다. 가슴 떨리는 꿈이라기보다는 ‘갖고 싶은 직업’에 더 가까웠고 그것은 오래 품을수록 이내 집착이 되었다. 거의 ‘되고 말리라!’라는 마음가짐으로 공부에 매진했던 것 같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갈 때 치른 수능시험에서 약대 입학에 한번 실패를 했지만, 이후 20대 중반쯤에 다시 약대 입학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약사가 되었다! 그리고서는 생각했다.
‘어라.. 내가 약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가 뭐였더라?’
물론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안정적인 직업, 여자로서 아이를 낳고 나서도 경력단절이 심하지 않을 수 있는 직업, 사회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전문직, 큰 포부를 가지고 신약개발 등 어떠한 인류의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는 일 등등. 그것들은 ‘좋은 직업’을 말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이유들이었고, ‘가슴 떨리는 꿈’이라 불리기엔 부족한 이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 내가 처음으로 약사를 꿈꾸기 시작했던 이유.
#어릴 적 꿈과 서른 살의 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정말로 가슴 떨리는 꿈이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온갖 주인공들의 일화가 눈앞에 아른아른 거려 잠을 이루지 못한 때가 많았다. 혹여나 잊어버릴까 봐 새벽에 벌떡 일어나서 그림을 그려두기도 했던 그때 그 시절. 내가 사람의 인체 중 잘 못 그리던 부분이 손이었는데, 나는 손을 완벽히 그리기 위해 동네 만화방에서 손을 잘 그리는 만화가의 작품을 여러 권 대여해서 종일 손만을 연습장에 한가득 그려가며 연습하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은 훈련을 그렇게도 열심히 했었다니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참으로 신기하다. 오늘날의 내가 서른이 넘은 이 시점에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정말 쉼 없이 공부했고 노력해왔지만, 사실 그때 그 어린 나만큼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했던 적은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런 나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나의 부모님은 이런 내 꿈을 그저 지나가는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셨다. 아니, 어쩌면 공부를 시키고 싶어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셨을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어린이들이 그러하고 많은 어른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내가 진지하게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첫 대입시험에 낙방해서 그냥 후기에 지원하는 예술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께서는 거의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셨다. 엄마는 ‘우선은 공부를 하고 번듯한 직업을 가진 후에 나중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림을 그리려고 해도 재료값을 벌어서 그려야 하니 다른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 등의 말로 나를 설득을 하셨고, 그 말들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에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가슴속의 불씨들을 잠시 꾹꾹 눌러 담고 우선은 공부를 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약사’라는 전문직이 새롭게 꿰차고 들어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쯤에 뒤늦게 공부에 열정을 다하면서 나 스스로도 학업 성적에 대한 승부욕도 생겼었고,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의 성취감, 보람 그리고 학문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었으니 이러한 변화들이 억지로 왔다고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나는 거의 10년을 공부에 매진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공부에 매진했다’함은 나의 오랜 취미이자 특기인 그림 그리기는 쓸데없는 딴짓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내일이 중간고사인데 그림이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유혹의 손길이 종종 있었다. 실제로 밤샘 공부를 하다 말고 갑자기 색연필을 집어 들면서 ‘한 시간만 그리자.. 딱 한 시간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도 점점 그 빈도는 적어졌다.
너무 억누르고 억눌러버려서일까? 약사 면허를 딴 뒤 첫 직장에 입사하여 어엿한 사회인이 된 후 모든 준비를 완료한 어느 날, 퇴근 후 그림을 그리려고 카페에 각 잡고 앉아서 흰 도화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연필을 들었을 때 내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리고 싶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 충격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을 해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에게 가장 큰 놀이터였고 가장 큰 휴식처는 그림이었는데, 이 흰 도화지가 나에게 이렇게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오는 경험은 정말 난생처음이었다. 이제는 그림을 그릴 모든 준비가 되었는데 그림이 나에게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날 카페에서 흰 도화지를 앞에 두고 정말 꺼이꺼이 목놓아 한참을 울었다. 내겐 정말 가슴이 시리고 너무 아픈 경험이었다. 마음을 억누르고 억누르다가 나는 마침내 그것을 잃어버렸다. 늘 내 안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나’를 잃어버렸다.
#타인의 찬란한 꿈
약사 면허를 딴 후의 나는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진로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나에게 ‘약사 면허’ 자체가 목표가 된 것을 반성하였다. 직업을 꿈꿀 때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떠올리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를 테면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따뜻한 학교 선생님’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가진 꿈에는 그동안 형용사가 부재했다. 나는 이 방황의 시작점에서 내가 관심 있는 것,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해야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남들 보기에도 번듯한 것(무섭게도 이것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특징이다.)이라는 다섯 가지 정도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으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떤 가치관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이것저것 머리로만 견주다 보니 결국 졸업 후에 바로 직업을 고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급하게 고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하며 일주일에 이틀 정도만 일을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진로 고민과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다. 직장 선택을 잠시 유예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첫 직장에 대충(?) 입사하였다. 병원 약국은 대부분 야간 전담 약사를 따로 뽑는 데다가 2교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야간 전담 약사들은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 입사하는 사람은 아니다. 대부분 무언가를 하기 위해 거쳐가는 곳으로 여기고 일을 한다. 그리고 그런 집단에서 나는 생각지 못하게 다양한 꿈을 가진 약사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오지로 여행을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야간에 일을 하고 한 번씩 해외의 특이한 나라(남들이 관광지로 흔히 선택하지 않는 나라)를 다니는 약사,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예술 종합대학을 다시 입학하여 학교 생활을 하며 연극배우를 하고 계시는 약사,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모으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약사, 어렸을 적부터 오랜 꿈인 ‘조향사’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향수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준비하는 약사 등등. 약 2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다양한 꿈을 간직한 약사들을 만났다. 아마 야간 당직이라는 특성상 다들 하고 싶은 바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그 어떤 빵빵한 기업이나 병원에 들어간 약사들보다도 더 멋있게 느껴졌다. 사실 학교를 다니다 보면 유명하고 큰 조직, 순위가 높은 대학으로의 진학 등을 더 우러러보게 되는 경향이 있고, 나도 그런 파도에 휩쓸려 다니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이곳에서 만나게 된 다양한 꿈의 모습들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나는 그 동료 약사들을 보며 진심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진짜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 감탄했다. 다들 반짝반짝 눈이 부셨고, 바라보는 내내 응원이 절로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눈부심으로 인한 그림자는 곧 내 자신 위로 드리워졌고 이내 서글퍼졌다.
나에게도 꿈이 있다면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지금이라도 용감하게 유학을 가는 등 내 꿈을 위한 투자를 할 마음이 있는데,
그 용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보다 앞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