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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yking Aug 08. 2021

서른 살, 우울의 원인에 대한 고찰들(1)유년시절

#1. 유년시절_성격 형성과 부모와의 관계

 나는 서른 즘에 찾아오는 우울에 대한 원인을 아주 많이 적어 내려 갈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인을 명확하게 찾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모두 아주 조금씩 내 옷을 젖어들게 하여 결국에는 축축하게 축 늘어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원인들을 적어 내려 감에 있어서 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생각나는 대로 적고자 했을 뿐 그 어떤 순위나 기여도 같은 순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적고 싶었고, 동시에 가장 먼저 적기가 머뭇거려지는 원인은 바로 ‘유년시절’이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유년시절에 겪은 부모님을 포함한 어른들로부터 받은 경험이다. 가장 먼저 적고 싶었던 이유는 내게 너무나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고 분명 연관성이 짙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기가 머뭇거려지는 이유는 사랑하는 부모님께서 혹시라도 언젠가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당신들께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될지도 몰라서이다.

 나는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누군가가 가족관계를 물어볼 때 흔히 ‘딸, 딸, 아들’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형제 관계도에서 힘들었겠다고 불리는 둘째 딸이다. 그리고 아주 공교롭게도 언니와 남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행동들ㅡ 어떤 지시를 내렸을 때 그것을 잘 따라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드물고, 글을 떼기도 전에 책을 낭독해주는 것 만으로 동화책 한 권을 외운다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문 공부에 매진하는 그런 영특함ㅡ을 아주 잘도 했다. 형제들이 나를 괴롭히려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상황들이 몹시 불편하고 짜증 났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나는 항상 부모님이 시키는 일에 왜 그래야 하냐는 질문을 달았고 (순수한 의문이었어도 결과적으로는 말을 안 듣는 형상이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때 까지는 학업성적도 좋지가 못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 나는 만화를 그리는 일에 거의 심취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내 연습장에 빨리 다음 내용을 그려야만 속이 시원했다. 지금은 평범한 어른이 되었지만 그 시절 그때에는 우리 학교에서 그림 잘 그리는 친구라고 하면 항상 내가 입에 오르내렸고, 미화부장은 늘 내 몫이었다. 내가 연재하는 만화를 보러 다른 반에서도 친구들이 놀러 와서 내 연습장을 빌려가곤 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이 아주 뿌듯하고 즐거웠다. 요즘으로 따지면 웹툰에 달리는 독자들의 댓글과 같은 그런 반응들이 연습장 뒷면에 가득했다. ‘재밌었어~ 빨리 다음 편 부탁해!’, ‘그림 정말 잘 그린다’ 등의 칭찬들. 그 뿌듯함은 나를 더욱 가열차게 그림을 그리게 했고 동시에 공부와는 더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수학익힘책을 풀어오라는 숙제를 내어주면, 연습장을 가득 채워놓은 ‘2+3 =?’과 같은 문제들을 보고 나는 신나게 계산기를 두드려서 문제를 다 풀었고, 그렇게 신나게 두드려서 엄마한테 혼났다. (그래도 숙제를 안 한 것은 아니고 다 끝마쳤으니 성실하긴 했었던 것 같다.) 반항심 같은 건 절때 아니었다. 그저 문제를 풀어오라고 하는데 문제가 많으니 그걸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다 해결해두었을 뿐이고, 계산기를 이용하면 이런 것들을 다 쉽게 할 수 있는데 대체 왜 내가 직접 이걸 오랜 시간을 들여 계산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한 행동이었다. 언어 시간에는 엄마가 반의어를 가르치기 위해 ‘차갑다’의 반대는 ‘뜨겁다’와 같은 걸 가르쳐 주셨는데, 나는 죄다 ‘안’을 붙였다가 또 한참을 애먹었다. 나도 애먹었지만 엄마도 아주 많이 힘드셨을 것 같다. ‘차갑다’의 반대는 ‘안 차갑다’라고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뜨겁다’를 배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한 행동이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엄마에게 이런 전화를 한적도 있다고 했다. “얘는 중학생이 되면 문제아가 될 수도 있겠어요. 주의를 주셔야 합니다 어머님.” 그때 그 선생님은 굉장히 무섭고 화가 많으신 아줌마 선생님이셨는데, 나를 굉장히 싫어하셨다. 그때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가 하필 키가 제일 큰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친구를 따라 맨 뒷자리에 앉았었다. 수업시간에는 신나게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늘 그런 모습이었던 나는 학부모 참관수업 때도 너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드려 우리 엄마에게 적잖은 충격을 선사했다. 한 번은 내가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학교에서 여자 친구들에게 예쁜 그림을 그려주고 인기를 얻어 부반장이 되었는데 (정말 그림 때문에 된 것만 같다.) 쓰레기를 버리고 오라는 선생님의 심부름에 쓰레기 봉지를 들고 학교를 배회하다가 다시 교실로 들어가서 “소각장이 어디예요?” 하고 물어봤다가 아주 많이 혼났던 기억이 난다. “넌 부반장이 어떻게 된 애가 아직도 소각장이 어딘지도 모르니?”라고 혼났던 것 같은데, 어른이 된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그때 왜 혼난 건지 진짜 이해가 안 간다. 난 소각장이 정말 어딘지 몰라서 모른다고 물어봤을 뿐인데 말투가 불순해 보였나? 아니면 평소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것마저 모른다 하니 화가 나신 건가. 아무튼 어른들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빠는 회사 업무가 바쁘셔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시진 않았는데, 나는 늘 아빠와 함께 있으면 방에 갇혀서 혼났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이유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나를 방에 가두고 혼내셨고, 나는 잘못했다고 인정할 수 없을 때는 절대로 잘못했다고 말하기 싫어했던 것 같다. 주말이면 가족회의로 전지를 놓고 아빠가 뭔가 진지한 글을 적으셨는데 그런 자리에서도 늘 아빠는 이야기 끝에 나에게만 화가 나셨다. 다른 형제들은 가만히 있는데 나는 또 열심히 무언가 반론을 제기했었나보다. 물론 나도 아빠한테 화가 났었다. 아빠는 늘 나에게 “네 생각은 틀렸어!”, “넌 궤변을 늘어놓고 있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나는 너무 어려서 궤변이라는 말의 뜻조차 알지 못했지만 분위기나 단어에서 풍기는 발음의 어조 같은 것들이 몹시 기분 나빠서 아직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게 박혀있다. 나 그리고 내 생각들은 온통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 불순한 의도 없이 순수하게 그런 마음을 가졌었는데 매번 어른들에게 혼나니까 너무 서럽고 억울했다. 물론 어른이 되고 생각해보니 부모님과 선생님들 께서도 답답해서 가슴 꽤나 치셨을 법도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오해로 인해 나는 ‘삐딱한 아이’로 꽤 오랜 시간 동안 낙인이 찍혀버렸다. 학교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전혀 모범생이 아니었다. 이런 나와는 반대로 우리 언니와 남동생은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르게 모범적인 학생들이었다. 언니는 무슨 과학 우수평가였나에서 2등을 했었고 남동생은 천자문과 바둑, 장기 등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기도 했고 초등학생 때는 전교 어린이 부회장도 했었다. 정말 왜 저러나 싶고 미웠다. 공부도 공부지만 신체적인 부분도 문제가 되었다. 부모님들께서는 그 시절 또래 어른들에 비해 키가 큰 편이셨고, 언니랑 동생도 또래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는데, 나는 아무런 유전적 이유도 없이 혼자서 작아도 너무 작았다. 항상 반에서 키 순서대로 서면 나는 1번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한 번도 1번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튼튼하지도 못했고 늘 부모님께서는 내가 허약하다는 것을 걱정하셨다. 하여간 나도 본의 아니게 부모님 속을 여러모로 많이 썩였던 것 같다. 언니는 비평준화 시기에 고등학교 입시를 치렀는데 성적이 정말 우수했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학교에 입학했었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 학교에 가도 ‘네가 누구 동생이구나’ 하는 말만 하실 뿐 나한테 관심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그 사실을 들키면(?) 나에게는 끝없이 비교가 쏟아졌다. 중학교 1학년 때 첫 시험이 끝나고 담임과의 상담이 있던 날, 자기도 처음으로 담임으로 부임했다던 26살의 젊은 여자 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그 짧은 상담을 마치고 나는 엉엉 울면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어머, 네가 OO이 동생이었니? 걔 OO고 합격했지? 참 애도 키도 크고 공부도 잘했는데 근데 넌…”  

선생님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스로도 말실수한 것을 깨달은 듯이 화들짝 놀라며 화재를 돌리셨다. 아무리 어린 나이여도 그것은 확실히 느낄 정도는 되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담임과의 상담이라 잔뜩 설렘과 부끄러움에 긴장했던 나에게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심을 느꼈던 날이 되었다. 그저 온전히 나였을 뿐이었고 아무런 잘못도 없었지만 나는 왜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었을까.

하루는 엄마가 내 신발을 사준다고 해서 신나서 신발가게에 갔는데, 엄마는 가게 주인아저씨와 한참을 자리에 있지도 않은 우리 언니 얘기를 했다. “얘는 발이 작아요. 얘 언니는 또 발이 엄청 큰데! 걔가 이번에 OO고 합격했어요~” 자랑스럽게 언니 얘기를 나누느라 신난 엄마 옆에서 혼자 조용히 이 신발, 저 신발 신고 있던 초라한 그 기분은 아직도 정말 생생하다. 속으로 계속 툴툴거렸다.

‘지금 내 신발 사러 온 건데 언니가 왜 나와….’

지금까지 굉장히 생각나는 장면인 걸로 봐서는 어린 나에게는 꽤나 상처가 된 날이었나 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사건들 말고는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나는 것은 그저 엄마, 아빠, 선생님들은 항상 언니랑 동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과, 나는 문제아라는 생각과 느낌 뿐이다. 그리고 언니랑 남동생은 부모님의 시선이 없는데서 나를 아주 신나게 괴롭혔었다. 내가 성질부리다가 부모님이 발견하시게 되면 늘 낙인이 찍혀있던 나만 ‘역시 못된 애’가 돼버리는 것 같은 순간이 아주 많았다. 언니랑 남동생이 모범생이고 착하기는 했지만 매번 그런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현실이 답답하고 힘들었던 기억은 있는데,  나는 이것에 대해서 당시에는 억울하기는 했지만 마음 깊이 속상해하고 우울하게 생각해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어떤 방어 기제가 작용해서 나 자신을 상처 받지 않게끔 하기 위해 무덤덤하게 스스로의 감정을 조작했던 걸까. 나는 그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나를 싫어하는구나. 뭐, 어쩔 수 없지. 나도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러나 나는 사실 엄마 껌딱지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엄마 껌딱지로 살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 7살 정도부터 17살 정도까지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는 항상 덤덤하게 저 문장을 속으로 되뇌었다. 아마 내가 엄마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버리면 지금 이 상황이 더욱 상처가 될 것 같으니 그것을 방지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주 어린 시절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유치원생 때를 지나고 나서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의 나는 엄마 옆에 별로 얼씬거리려 하지 않았다. 그 어린 날의 내가 지금에 와서 보니 너무나 안타깝고 속상하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인가 아줌마들이 저녁 늦게까지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을 때, 나는 어쩌다 보니 엄마 옆에 앉아있다가 잠에 들었다. 살짝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고 그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엄마가 내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볼에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귀 뒤로 넘겨주고 계셨다. 그 포근함과 손길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리고 그때 아줌마들이랑 대화하다가 엄마가 아줌마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가 다른 아줌마들한테 언니나 남동생이 아닌 내 이야기를 하고 계시다니!'

 나는 누군가에게는 별것도 아닐 수 있었던 그 순간이 너무 기뻤다. 나는 엄마의 따듯한 손길이, 그리고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나에 대한 관심이 사실은 너무 좋았던 것이다.


 다행히도 여러 가지 비교 끝에 그것이 또 어떤 힘으로 작용하였던 것인지, 나는 엄청 노력하는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키가 크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8시에 매일매일 수영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다. 그 결과로, 키도 정말 뒤늦게 쑥쑥 크더니 지금은 평균 정도의 키가 되어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는 전혀 듣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 성적도 중학교 1학년 때는 200등 안에는 들었나 그랬던 것 같은데, 졸업할 때에는 전교에서 6등으로 끝마쳤고 학교에서는 졸업식날 내게 무슨 진보상 같은걸 선물해주었다. 이후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꽤나 잘해서 반에서 1등도 했었다. 신기한 건 내가 크게 달라지고 난 이후부터 어른들은 날 항상 예뻐했다. 선생님들도 날 항상 예뻐해 주셨고, 늘 무언가를 믿고 맡긴다고 표현하셨다. 엄마랑도 언제부터인가 굉장히 가까워져서 오히려 고등학교 때부터 20대 내내 뒤늦게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지냈던 것 같다. 힘들 때마다 달려와서 껴안고 머리를 만져달라고 했고 엄마는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주셨다. 뒤늦게 엄마에 대한 사랑을 쟁취한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이제는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렸을 때 겪은 그 기억은 지울 수가 없다. 아무리 지금은 어른들이 나를 예전처럼 대하시지 않는다고 해도 유년시절의 상처들은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물론 모난 부분이 많이 깎여 나가 예의 바르고 순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는 있었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항상 자신감이 없고 눈치를 보는 성격이 크게 자리 잡은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항상 큰소리로 자기주장을 펼쳤고, 내가 좋으면 남의 눈치도 별로 안보는 개성 있는 성격이었던 거 같은데, 사춘기를 지나고 보니 나는 그와 정 반대로 내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부터 듣고, 내 의견은 속으로 숨겨놓는 경우가 많았고, 가끔씩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 잘 눈치채지도 못했다.  내가 이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기 머뭇거려지던 이유는 모든 나의 이런 변화들을 마치 남 탓을 하는 마냥 늘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환경이 어찌 되었건 거기서 반응하고 변화했던 것은 나와의 상호작용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에서 성격 형성의 원인, 우울증 등을 파헤쳐가다 보면 항상 어김없이 ‘유년시절 부모님과의 관계’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정말 많은 서적에서 그것을 손꼽는다. 물론 학문적인 서적들이야 어쩔 수 없이 그런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줄 수밖에 없고, 그런 분석들을 보면 ‘맞아, 나도 이래서 이렇게 된 거였구나.’ 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끝에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답답한 내 마음은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그래서…? 원인이 과거에 있다는 것은 잘 이해했어. 하지만 이미 이렇게 커버린 나를 어떻게 하라고…?’

원인을 과거에서 분석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가끔씩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의 마음 같은 것들.

하지만 부모님도 그 당시의 나이가 지금의 나의 나이와 비슷한 미숙한 어른이었을 테고, 또 부모역할이 처음이라 당신들도 쉽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부모님의 탓을 하는 일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만약 나와 같은 시간들을 지나오고, 현재의 나는 왜 우울한지, 왜 이런 성격이 되었나 등의 원인을 분석하다가 ‘유년시절 부모님의 양육’ 등이 원인으로 걸려들어 원망의 마음으로 과거의 시간 속을 헤집고 있다면, 우리 함께 그 관심을 현재로 빨리 가져오자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나도 잘 안되어서 미숙한 부분이지만 말이다. 지나간 일에 관심을 가지고 심도 있게 그 인과관계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심리학자들에게나 맡겨두고, 우리는 그저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해해주고, 상처 받은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 현재 나 자신을 어루만져 주는 일에 집중을 해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어린 날의 솔직하지 못했던 내 감정들을 어른인 내가 이해하게 된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어린 시절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어린 그 나의 마음을 지금이라도 어른인 내가 이해해주니 큰 위안이 된다.

‘너 그랬구나. 너 그때 많이 속상했었겠다. 어른들이 잘못했네. 하지만 어른들도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닌 것 너도 알지? 어른인 나는 아는데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할 수 없었겠구나.’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된다. 과거에 너무 집중하면 서른 즘에 찾아온 이 장마 속 빗줄기만 더욱 거세어질 뿐이다. 내가 지금 집중해야할 것은 지금, 여기, '현재의 나'다.   

 

<힐링 추천> 에세이 쓰기.

자기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상처를 장문의 일기로 풀어내 보면 상당한 도움이 된다. 심리학 서적들을 두세 권만 읽어보아도 부모의 양육과 성격 형성에 대해 금방 찾아볼 수 있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자신의 유년시절을 돌아보고, 일기를 써 내려가 보길 추천한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내려 가면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정말로 서른이 넘은 어른이 된 나에게 아직까지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과 함께 눈이 퉁퉁 부었지만 가슴은 후련해진다.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오늘도 한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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