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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yking Aug 05. 2021

서른 살의 장마 (3)

#3. 각자의 몫이 된 먹구름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 중에 하나로, ‘우울한 감정은 마음의 날씨’라는 말이 있다. 가볍게 지나가듯 언제든지 잠깐 동안 나에게 먹구름과 비를 내릴 수 있고,  또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비구름은 지나갈 것이라는 점이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내가 서른이 넘고 맞이하게 된 이 지루하고도 기나긴 우울한 기분은 마치 장마철과 같았다. 햇빛 한줄기 없는 어두운 먹구름 아래에서 비가 세차게 퍼붓고, 예상치 못했던 곳들이 터지고, 무너지고, 어지럽혀지는 그런 기나긴 장마철.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외롭게 만든 사실은 이것은 온전히 나의 몫의 먹구름이라는 점이다. 옆동네에서는 해가 반짝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동네에서는 나보다 더 심하게 장마에 태풍까지 맞이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바로 옆에 있다 하더라도 온. 전. 히. 각자의 몫이다. 특히나 청소년기를 지나 더 이상 매일같이 나의 감정을 쏟아내지 못하는 ‘살기 바쁜 어른’이 되고 나서는 더더욱 말이다. 내가 장마에 온통 젖었다고 해서 내 옆의 친구의 보송한 기분까지 눅눅하게 젖어들게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원래 혼자 감정을 감당해내는 것을 좋아했지만ㅡ아마도 그렇게 하는 편이 의젓하고 마음이 튼튼하다고 생각해서였다ㅡ 서른이 넘고 처음 겪는 지속적인 우울한 기분 속에서 내가 스스로를 자꾸 혼자로 고립시켜놓고 탐색하는 모든 일련의 행동들이 나를 더욱 깊은 우울에 가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썩 현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런 어색함을 무릅쓰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나의 이런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날이 가끔씩 있을 때면 또다시 생각하게 되는 말. ‘아, 이건 온. 전. 히. 각자의 몫이었지.’ 지난 유년시절 어느 순간에서인가 특별한 인연이 되어 살기 바쁜 어른이 된 와중에도 서로를 잊지 않고 챙겨 만나는 ‘한때는 공통분모를 가졌던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외로운 마음은 찾아오게 된다. 시절의 인연을 지나 각자의 위치에서 수년간 성장하고 서로 다른 경험을 쌓아온 우리는 이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너무도 당혹스럽고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어떤 힘듦을 말했을 때, 되돌아오는 너의 반응은 이런 것들이었기에.


‘야, 그건 힘든 것도 아니야.’ - 여기서 최악은 ‘나는 너보다도 더 힘들었지.’ (그리고 숨어있는 ‘나는 이렇게 훌륭히 이겨냈어.’)

‘넌 잘하고 있잖아. 네가 그러면 나는 뭐가 되니.’ - 갑자기 시작된 은연중에 서로에 대한 비교.

‘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지 마.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나마 위와는 달리 나의 마음의 문을 닫히게 하지도 않았고 현명한 문장의 조합이라 좋게 들리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말. 왜냐하면 내가 이미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왜’ 그러냐니. 그러지 말라니. 나도 내 마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고, 이러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었는데. 결국 이런 대화는 더욱 나를 답답하게 할 뿐이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 우리는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을 묻어두고, 현재에서 그 아름다웠던 관계는 변질이 되어 버린다. 날이 선 반응을 만나면 같이 날이 서게 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은 서글프다. 하지만 너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는 나는 과연 누군가의 먹구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가?


 얼마 전에 새로운 일터에서 알게 된 분이 있다. 근무 중에 어쩌다 잠깐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사람이 내 손가락에 끼워진 장난스러운 은반지를 보더니 “그거 설마 예물반지는 아니죠?” 하고 물어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반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더욱 긴 대화를 나누었고, 그 사람에게는 오래전에 예물반지를 함께 맞췄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분은 아직 서른 초반의 미혼이었기에 나는 캐주얼하게, 그리고 당연스럽게 ‘결혼 과정에서 틀어지신 거예요?’ 하고 물어보았고, 그때 갑작스레 내게 되돌아온 대답은 10여 년 전에 사고로 여자 친구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평일 낮 업무시간. 이렇게 일상적인 순간에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모를 순간이었다. 그분은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거라면서 운을 뗐지만, 나는 사실 그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고 침묵을 할 수 도 없었다. 지난날의 어린 그의 마음을 누가 어떻게 감히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나는 얼마나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손가락에 끼워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장난스러운 반지를 보고 그 모든 시간들을 떠올리는 이 사람을 내가 어디까지 이해하고 위로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내가 듣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의 삶에 놓여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기억하는 순간부터 기억조차 나지 않는 유년시절의 상처까지.

 우리는 서른까지 살아오며 마주한 사람들의 행동을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눈빛으로 판단하는 습관을 많이 들여버렸다. 상처 받았거나, 혹은 상처 받기 싫어서 다소 방어적이고 불완전하게 행동하며 아무 말을 뱉어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를 향해서 똑같이 아주 불완전한 행동과 아무 말을 답장으로 뱉어버린다. 나를 뒤흔들며 스치고 간 사건과 경험들은 정말 많이도 늘어났는데, 이러한 방식의 대화를 주고받는 속상한 관계들이 함께 많아져버렸다. 결국 속 안의 이야기는 숨겨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숨기게 되고 더 단절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맑은 날의 일을 서로에게 전하고 나누고 보여주기 바쁠 뿐이다. 우리는 왜 각자 아파하며 모두 다 같이 이런 나쁜 습관에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뭐, 어쩔 수 없지. 이해도 가. 하지만 내 가까운 사람들 만큼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보여주어도 따가운 말을 뱉어내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너도 나도 습관이 잘못 들어버렸더라도 그런 대화는 끊어내려고 끊임없이 되뇌어야지. 나는 너의 삶의 행적을 전부 들을 수도, 아니, 다 듣는다 해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으니까.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도 말고, 함부로 판단하려 하지 말아야지. 그저 당신의 모든 비 소식을 들었을 때  ‘네 삶에서 너에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전부 옳다.’라고 말해주어야지. 그렇게 하나씩 꺼내어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되면 언젠가는 나의 벌거벗은 마음과 너의 벌거벗은 마음은 온전한 자신으로 서로의 장마 이야기를 전하며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겠지.


<힐링 독서 추천>

 정신과 의사이신 정혜신 선생님이 집필하신 책, ‘당신이 옳다.’

그 제목 만으로도 나를 울게 만드는 책이었다. 연신 ‘그랬구나. 그래 너는 그런 감정이 들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하고 스스로를, 그리고 상대방의 모든 감정을 인정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따듯한 책이다. 정혜신 선생님의 수많은 강의와도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시면서도 따듯한 문학적인 언어를 가지신 분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점은, 이 책을 내가 보게 되면 나는 위로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지만, 나를 만나는 상대방이 이렇게 나를 대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상대방에게 이 책을 읽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내 감정으로 인해 힘들 때 ‘당신이 옳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나는 그 한마디 말로도 고독의 늪에서 금방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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